자정부터 다섯 시간 동안 괴담이 펼쳐진다

[리뷰] 레오폴도 가우트 <고스트 라디오>

등록 2010.02.18 16:22수정 2010.02.18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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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라디오> 겉표지 ⓒ 문학동네

'고스트 라디오'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의 제목이다. 방송 중간에 광고도 내보내고 음악도 간간이 틀겠지만, 제목에서 연상되는 것처럼 이 프로의 핵심은 괴담을 들려주는 것이다.

그 괴담은 방송 진행자가 창작을 해서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청취자들이 자발적으로 전화를 해서 공개적으로 이야기한다. 소재도 다양하다. 어느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가족, 이상한 인형의 집, 이라크로 파병나간 아들, 빙해에 갇힌 선박 등.


괴담이니만큼 얼핏 듣기에 "정말?"하고 반문하고 싶을 만큼 이상한 이야기들이다. 일반 사람들이 도저히 믿지 못할 이야기 또는 정신나간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고스트 라디오'에서는 절대로 이야기하는 사람을 정신병자나 맛이 간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 그들의 경험을 진지하게 듣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방송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과연 얼마나 인기를 끌까? 레오폴도 가우트의 2008년 작품 <고스트 라디오>는 이런 식의 괴담전문 라디오 프로그램에 관한 이야기다. 멕시코에서 태어난 호아킨은 우연한 기회에 라디오 방송 진행자가 되고, 자신의 프로그램을 통해서 청취자들이 괴담을 들려주도록 만든다.

기이한 이야기를 즐기는 심야의 청취자들

다소 이상한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방송은 멕시코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멕시코에서 성공을 거두자 미국의 방송제작사에서 호아킨을 스카우트한다. 커다란 집과 대형 승용차 그리고 막대한 연봉을 조건으로. 미국의 온 국민이 호아킨의 목소리를 듣고, 전세계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그 방송을 청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호아킨은 미국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자정부터 시작해서 새벽 다섯시까지 무려 다섯 시간 동안 '고스트 라디오'를 진행한다. 광고나 음악이 나가는 동안에는 나름대로 쉴 수 있겠지만, 한 프로그램을 연속 다섯 시간 동안 진행한다니 이거야말로 괴담 같은 이야기다.

사실 호아킨이 이 방송을 하게 된 계기는 자신의 과거와 연관이 있다. 호아킨은 어린 시절에 사고로 부모님을 한꺼번에 잃었다. 얼마 후에는 가장 친하게 지내던 친구도 사고로 죽었다. 사고현장에는 호아킨도 함께 있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항상 목숨을 건졌다. 마치 호아킨이 타인의 생명을 훔쳐서 삶을 유지하는 것처럼.

'고스트 라디오'는 호아킨이 자신에게 일어났던 비극적이고도 기묘한 일들이 환청이나 환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려는 시도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경험들을 정당화하려는 마음도 함께 가지고 있다. 스스로에 대한 고해성사인 셈이다. 물론 방송이 시작되면 그런 사실들을 숨기고 '고스트 라디오'가 '한밤중에 벌어지는 괴기스러운 사건'을 들을 수 있는 끝내주는 방송이라고 말해야 한다.

호아킨은 미국에서도 역시 큰 성공을 거두지만 어느날 방송 중에 이상한 전화를 한 통 받는다. 호아킨을 알고 있는 듯한 사람이 전화를 걸어서 자신이 '고스트 라디오'의 시작과 끝이라고 말을 한다. 이때부터 호아킨의 현실감각도 형편없어진다. 현재와 과거가 뒤섞이고 이승과 저승이 교차한다. 그리고 과거의 망령들이 호아킨을 찾아오기 시작하는데...

'고스트 라디오'의 정체는 무엇일까

요즘에는 의식적으로 라디오를 챙겨서 듣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버스나 택시를 타지 않는 이상 라디오를 들을 일도 없다. 하지만 인터넷과 휴대폰이 세상을 점령하기 이전인 90년대 초만 하더라도, 많은 학생들은 밤에 라디오를 들으면서 공부(하는 척) 했다. 라디오는 새로운 소식을 알려주고 유행하는 음악을 틀어주고 때로는 폭소를 터뜨릴 수 있게 만드는 매개체였다.

호아킨에게 라디오는 그 이상의 역할을 한다. 방송과 라디오는 그의 집이나 마찬가지다. 편안함을 느끼면서 두려움없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 방송은 목소리들이 달리는 터널이고 고속도로다. 전파의 향연 속에서 소리와 음성이 청취자를 이끌어가는 눈먼 자들의 세상이다. 라디오는 이미 한물간 문명의 이기지만, 어찌보면 참으로 매력적인 구닥다리인 셈이다.

'고스트 라디오'는 하나의 매개체로 작용한다. 과학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신화같은 것을 사람들과 연결해주는 다리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청취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사연을 나누고 즐기려고 한다.

그 안에서 청취자들의 사연을 외로움이나 과거의 상처로 인한 트라우마 따위로 분석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괴담을 통해서 삶과 죽음의 비밀을 풀 수 있다는 거창한 명제도 필요없다. 라디오를 통해서 스스로를 바라보고 주위 사람들과 소통을 할 수 있으면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라디오의 전파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게 될지 누가 알겠나.

덧붙이는 글 | <고스트 라디오> 레오폴도 가우트 지음 / 이원경 옮김. 문학동네 펴냄.


덧붙이는 글 <고스트 라디오> 레오폴도 가우트 지음 / 이원경 옮김. 문학동네 펴냄.

고스트 라디오

레오폴도 가우트 지음, 이원경 옮김,
문학동네, 2010


#고스트 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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