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빨갱이라고 수군대던 그 분... 위대한 지도자였네

이젠 슬픔보다 남겨진 정신 이어갈 때...

등록 2009.08.19 14:18수정 2009.08.19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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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납치 직후 한국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 김대중도서관

일본 납치 직후 한국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 김대중도서관

내가 학교 다닐 때(초중고), 그 분은 빨갱이였다. 학교 선생님도 부모님도 동네 어른들도 모두 그렇게 말했다. 아니 그 분 이름조차 입에 올리길 꺼려한 적도 있었다. 그러니 자연히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그 분이 대통령이 되었다간 우리나라가 금방 빨갱이 나라가 되는 줄로….

 

직장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려서부터 세뇌되어온 내 뇌리는 그 분을 새롭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우리 부서에 호남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난 그만 내 식대로 말해 버린 것이다.

 

"아니 'DJ'는 한 번 은퇴했으면 그만이지 왜 또 나오는 거야. 되지도 않을 거 뻔히 알면서…."

 

"그 분 직업이 정치인인데 어떻게 은퇴란 게 있어요. 당신 더러 직장 그만두라면 당신은 좋겄소. 왜 잘 알지도 못하고 그분을 깎아 내리는 거요, 깎아내리긴."

 

말 한마디 잘못한 나, 그에게 호되게 당했다. 그러나 당했다고 내 마음이 달라지진 않았다. 그저 그 호남 사람 기세에 눌려 말을 안 한 것뿐이지. 그저 '아, 말 조심해야지 잘못하면 큰일 나겠구나' 하는 교훈만 얻고 돌아섰다.

 

영호남(난 경기도 사람)의 차별이 극심했던 한 때, 이런 말이 떠돌았다. 전라도에 가서 말 잘못하면 밥은커녕 물 한 모금 못 얻어먹고 쫓겨난다. 반대로 전라도에 가서 말을 잘 하면 아주 융숭한 대접도 받을 수 있다. 그 말의 주인은 바로 그 분. 김대중 선생이었다. 난 그저 떠도는 말이려니 의아해 하다가 직접 그 현장을 목격했다.

 

어느 날 친구와 향일암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여수 시내 한 식당에 들어갔다. 저녁을 먹으려고. 우리는 그냥 간단하게 매운탕을 시켰는데, 그 집은 새조개구이가 유명한 집이었던 듯,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새조개가 옆에서 야릇한 향기를 풍기며 구워지고 있었다. 우린 그만 염치 불구하고 입맛이 동한 눈길로 그쪽을 쳐다 보았다, 한 두번쯤.

 

우리의 눈길을 눈치챈 한 남자, 잽싸게 새조개구이 한 접시를 우리 식탁에 갖다 놓았다.

 

"이거 아주 맛있습니다. 맛이라도 좀 보십쇼." 

 

거기다 또 한 남자 아예 소주병을 들고 우리 자리로 와서 술을 따랐다. 그러고는 민망해서 인사도 제대로 못하는 우릴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아직도 귀에 생생한 그 소리….

 

"이래야 우리 김대중 선생 표 하나라도 더 얻을 거 아닌가. 확실하게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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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의 석방을 촉구하는 재일 '한민통' 회원들. ⓒ 김대중도서관 자료사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석방을 촉구하는 재일 '한민통' 회원들. ⓒ 김대중도서관 자료사진

매너 좋게 자기 자리로 돌아간 그들, 계속 화기애애하게 음주를 했다. 김대중 선생 이야기도 나오고 방송 이야기도 나오고. 아마도 그 분들 여수 KBS에 다니는 분들 같았다. 소문의 진상은 확인했지만 그렇다고 내 마음이 움직인 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워낙 확고하게 그 빨갱이 설이 뿌리 박혀 있었으니…. 여전히 그 분은 북을 등에 업고 여론을 선동하는 간첩 같은 자였다.

 

그러던 나에게 새로운 시야를 선사한 건 한겨레 신문이었다. 난 그때 건물 지하에 작은 상점을 열고 있었고, 동아일보를 구독했다. 그런데 경비 아저씨가 한겨레 신문이 남는다며 매일 한 부씩 덤으로 주었다. 그건 정말 심심풀이였다. 이리저리 뒤적이다 마음에 드는 기사나 있으면 골라서 읽었고. 그러다 그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백두산 여행을 신청하였다. 한 여름 몇 차례에 걸쳐 가게 되는 한겨레신문사 주최의 큰 행사였다.

 

나와 함께 떠난 팀은 한 삼사 십 명쯤. 그런데  내겐 정말 인상깊은 여행이 되었다. 어딘가 엉성하지만 자유롭고 그러면서도 추구하는 목적이 뚜렷한 그 많은 사람들이 퍽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 백두산에서 돌아온 나 결국 보던 신문을 끊고 한겨레 신문을 신청했다. 2년을 공짜로 봤지만 이젠 제대로 돈내고 봐야겠다며. 그리고 늦게나마 느·꼈·다. 나 또한 그 사람들과 비슷한 성향이었다는 것을. 그때 난 매료되었다가 동화되었다가 아주 포섭되었던 것이다.

 

거기에 한 번 발이 빠지고 나니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소설쓰기 수강도 했고 인문학에 대한 수강도 했다. 아주 그 빨갱이 무리에 흠뻑 빠져 깊이깊이 들어간 것이다. 차츰 'DJ'에 동화되었고 우리나라의 흥망성쇠가 보였다. 그 분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그 명확한 진실을 알기까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 대신 나는 추호도 의심 없이 그분을 지지하였다. 물론 그 분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난  왕팬이 되었고, 누군가가 그분에게 흠집이라도 낼까봐 노심초사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DJ'에 대한 마음은 고스란히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전이되었다. 그 당시 여당조차도 등을 돌렸지만 난 이면을 보았다. 두 대통령 다 안타까웠다. 마음대로 한 번 발 떼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보수 언론에 보수 논객에 여태껏 자리 차지하고 위엄부리던 보수단체까지 제동을 걸고 막아 섰으니….

 

하지만 난 그 분들을 새롭게 평가 할 날이 올 거라 믿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것을 깨달아가고 있다. 새 정권은 분명 달랐다. 두 분 대통령이 추구하고자 했던 것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래서 국민들은 두 분을 위대한 지도자로 다시금 받아들이고 슬퍼하고 있다. 노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몇 달, 우리는 또 한 분 김대중 대통령을 잃었다.

 

그러나 몸은 가셨지만 그 분의 따뜻한 마음과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려는 큰 정신은 여기 이곳에 우리와 함께 머무르고 있다. 이제 우리에겐 큰 숙제가 생겼다. 그 분을 위대한 지도자로 섬겼던만큼 민주주의에 대한 열의를 잃지 말고 지켜야 한다는 그것이다. 우리는 그 분을 잃었다고 생각하지 말자. 그 분의 정신이 남아있는 한 우리는 결코 그분을 잃은 게 아니니까. 일회성인 눈물보다 당찬 각오로 그 분의 육신을 보내드리자. 편안한 곳으로…. 그리고 우리 몫의 숙제를 완성해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자.




2009.08.19 14:18 ⓒ 2009 OhmyNews
#김대중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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