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공포 주체는 대통령인가 행안부 장관인가?

[사례분석] 대통령 법률안 서명일 관련 프랑스-러시아의 경우

등록 2009.07.27 15:15수정 2009.07.27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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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7일 발행된 대한민국 관보. 국유재산법 시행령 개정안의 관보발행일도 7월 27일이고, 대통령의 공포일(서명일)도 7월 27일이다. ⓒ 전자관보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회를 통과한 '물권법'과 '기업소득세법'이 지난 2007년 3월 16일 공포(公布)되었다. 그런데 이 법안들은 사흘 뒤인 3월 19일에서야 국영통신사인 <신화통신>에 게재되었다.

이에 한 전인대 대표는 <인대연구>에 발표한 기고문을 통해 '왜 3월 16일 공포된 법안들이 왜 3월 19일에서야 게재되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문제 제기의 법률적 근거는 중화인민공화국 입법법 제52조였다.

'법률의 서명 공포 후 즉시 전인대 상무위원회 공보 및 전국적으로 배포되는 신문에 게재한다.'

이러한 문제제기가 가능한 것은 '법률적 개념'으로서 공포와 '사회적 통념'으로서 공포의 개념이 서로 섞여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전자는 '공포', 후자는 '공시(公示)' 혹은 '공표(公表)'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프랑스] "공포는 법률의 합법적인 탄생을 확인하는 행위"

한국에서 대통령이 법률안에 서명할 때 '서명일'을 명기하지 않고, 공포일을 관보발행일과 일치시키는 것도 이러한 개념의 혼란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7월 6일자 <대통령 서명 법률안에 왜 '서명일'은 없나?> 보도 참조).

하지만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유럽연합 국가들과 러시아 등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대통령의 서명일이 공포일로 간주된다. 당연히 공포일(Date of document)과 공시일(관보발행일, Date of publication)은 서로 다르다.

프랑스에서는 '공포'와 '공시'의 개념을 정확하게 구별한다. 먼저 공포라는 개념은 이렇게 규정돼 있다.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은 법률이 정부에 이송된 후 15일 이내에 공포한다. 공포는 법률의 합법적인 탄생을 확인하는 행위이다. 법률은 관보에 게재된 후 한나절의 유예기간이 경과하지 아니하는 한 국민에 대해 의무를 지울 수 없다."(살비니의 저서 <의회> 중 드브레 프랑스 의회 의장의 권두사, 2003년)

'법률의 합법적인 탄생을 확인하는 행위'가 공포라는 설명이다. 이는 법률이 대통령에 의해 서명·공포되어야 비로소 '법률'로서 확정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프랑스에서 '공시'는 어떤 개념일까? 프랑스 법원의 <법률사전>에 따르면, 공시란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는 행위로서 공화국 관보에 게재되는 법적 절차"를 가리킨다.

정리하면, 공포는 대통령의 서명을 통해 법률을 확정하는 행위이고, 공시는 출판물 등을 통해 국민에게 널리 알리는 행위로 법률 효력을 발생시키는 절차다. 그래서 대통령이 공포한 법률이라도 공시를 통해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으면 법률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이렇게 공포와 공시의 개념이 확연하게 달라서 프랑스에서는 공시와 관련된 법률('법률 및 행정입법의 공시 방식과 효력에 관한 법률명령')이 별도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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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관보에 실린 '저축은행과 대중은행의 중앙기구에 관한 법률'. 관보발행일은 2009년 6월 19일이고, 사르코지 대통령이 서명·공포한 날은 관보발행 하루 전날인 6월 18일이다. ⓒ 프랑스 정부


[러시아] '공시'에 해당하는 '오푸블리코바니예'는 근대적 개념

러시아도 프랑스와 비슷하다. 러시아의 '연방 헌법적 법률, 연방법, 연방의회 규정의 공표(발행)와 효력발생절차에 관한 1994년 6월 14일 연방법 No5-연방법' 제3조에는 "연방 헌법 법률, 연방법은 러시아 연방 대통령의 서명 이후 7일 이내에 공시되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러시아에서도 공포와 공시의 개념을 분명하게 구별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공포일'에 해당하는 서명일과 '공시일'에 해당하는 관보발행일이 다르다.

러시아에서는 공포를 '오브나로드바니예', 공시를 '오푸블리코바니예'라고 표현한다. 고려대 러시아·CIS연구소는 "오브나로드바니예는 신문, 방송, 전단, 포고령, 출판물 등 가능한 여러 수단을 동원해 대중에게 널리 알린다는 뜻이고, 오푸블리코바니예는 인쇄, 활자매체를 통해 문서화해 알린다는 뜻으로 더 세분화, 국한된 용어"라고 설명했다.   

"중세로부터 근대로까지 이어지던 시절 법령은 적지 않은 경우 구두로 또는 포고문의 형태로 광장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발표되었다. 그 연유로 오브나로도바니예라는 단어가 역사적이며, 관습적이고, 가장 일반적이고 광범위한 뜻에서 '대중에게 알린다'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이에 비해 오푸블리코바니예라는 단어는 현대의 어의적 정밀성이 추가되어 그 어떤 다른 방법이 아닌 신문, 잡지, 단행본 등의 '인쇄물로 활자화되어 사람들에게 알린다'는 뜻을 지닌다."

왕의 선언만으로도 법률을 확정하고 법률 효력을 발생시켰던 근대 이전과는 다르게, 인쇄술이 발전하고 민주주의가 도입된 근대 이후에는 문서화된 출판물을 통해 법률의 확정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려야 법률 효력이 발생했다는 얘기다. 

또한 러시아 헌법 제15조 3항에는 이런 규정이 명시돼 있다. 

"모든 법률은 공표되며 공표되지 않은 법률은 효력을 갖지 못한다. 시민의 권리, 자유 및 의무에 관계되는 규범과 법률은 보편적 고지를 위해 공표되지 않으면 효력을 갖지 못한다."

공시(공표)행위를 법률 효력이 발생하는 필수조건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소준섭 국회도서관 해외자료조사관(국제관계학 박사)은 지난해 가을 <중소연구> 119호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는)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법률에 명확하게 반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했다.

소준섭 조사관은 "이 점에서 러시아 헌법은 여전히 '공포'와 '공표'를 혼돈하면서 헌법개론이나 입법학용어해설에서조차 '공포를 효력발생 요건으로 규정하는 우리 나라의 경우보다 훨씬 진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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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독자가 보내준 독일 관보. 프랑스 등처럼 공포일과 관보발행일은 서로 다르다. ⓒ 독일연방법령관보


[한국] 공포일=관보발행일... "통수권자가 대통령? 행안부장관?"

세계적 추세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경우 대통령이 법률을 확정하는 서명을 하면서 서명일을 명기하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는 공시일에 해당하는 관보발행일이 곧 공포일이다.

관보에 실린 '국유재산법 시행령' 개정안을 보자. 이 시행령 개정안이 실린 관보는 27일 발행됐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 이름 아래에 '2009년 7월 27일'이라고 적혀 있다. 공포일을 관보발행일에 일치시키고 있는 셈이다.

이는 법률을 확정하는 대통령의 공포행위를 혼란스럽게 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공포일과 관보발행일을 일치시킴으로써 서로 다른 법률적 행위이자 절차인 공포와 공시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 그래서 "입법절차의 심각한 하자"라는 문제제기가 나온다. 

소준섭 조사관은 "옛날에는 왕이 법률을 반포하면 그걸로 끝났지만 민주주의가 도입된 근대 이후에는 선언(공포)만 해서는 안된다"며 "반드시 법률 확정사실을 출판물을 통해 국민들에게 알려야 법의 효력이 발생한다"고 말했다.

소 조사관은 "대통령이 서명함으로써 법률은 확정된다"며 "그런데 공포일과 관보발행일을 일치시킴으로써 통수권자가 대통령인지 관보를 발행하는 행안부장관인지 혼란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9일 쪽지함을 통해 저에게 독일관보를 보내주신 익명을 요구한 한 독자에게 감사한다.


덧붙이는 글 지난 9일 쪽지함을 통해 저에게 독일관보를 보내주신 익명을 요구한 한 독자에게 감사한다.
#대통령 법률안 서명일 #공포일 #공시일 #관보발행일 #소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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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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