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사람] 북 여자장교와 남 물리학도의 조우

[김갑수 한국전쟁 역사팩션 13회] 제3장 '양다리'

등록 2009.03.01 15:47수정 2009.03.01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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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양(兩)다리

 

조수현은 나들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비누 세안을 마친 그녀는 거울 앞에 앉아 손바닥으로 얼굴을 도닥거려 보았다. 전쟁 중의 서울은 평양에 비해 훨씬 먼지가 많았다. 더 이상 피부크림을 구하기가 어려울 터이니 자주 세안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긴 하지만 거울 속의 그녀는 여전히 촉촉한 피부 감촉과 말끔한 얼굴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거울 속의 자기에게 눈을 깜박거려 보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머리를 묶으러 두 손을 들어 올리자 알맞게 붙은 겨드랑 살이 살짝 드러났다.

 

조수현은 황혼녘에 북한산 방향으로 날아가던 백로를 생각했다. 여름 철새인 백로는 이따금 지구대 앞 개천으로 날아와 하얀 자태를 뽐내면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수려한 북한산 자락으로 날아가고는 했다.

 

그녀는 군복 대신 검정 치마에 하얀 모시저고리를 입었다. 전쟁이 나고 처음으로 미복 나들이를 해보는 셈이었다. 손가방을 든 그녀는 검은색 새 구두를 꺼내 신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정문 경비병이 웃음을 머금으며 그녀에게 경례를 붙였다.

 

"동무, 저녁식사는 했습니까?"

"네.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마을로 들어선 그녀는 가게에 들러 박하사탕을 사서 입에 물었다.

 

"김성식 선생 댁이 이 근처이지요?"

 

가게 주인은 손가락으로 길 건너편 대문을 가리켰다. 그에게 볼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심결에 그의 생각이 났기에 그냥 물어본 것인데, 의외로 집을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김성식의 집 쪽으로 걸어갔다. 대문이 닫혀 있었다. 딱히 그를 만나야 할 용무가 없는 터에, 무단히 대문을 두드릴 수는 없었다.

 

이태준, 한설야 같은 예술가도 "김일성 장군 만세" 

 

그녀는 오동통하게 차올라 있는 달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언덕에 올라가 배밭을 내려다보고 싶었다. 낮에 싱싱하고 무성했던 신록은 저녁이 되어 휴식이라도 취하는 양 부드럽고 온순해 보였다. 나무들마다 은은한 수향(樹香)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구두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보폭을 줄이며 걸었다. 고즈넉한 숲의 정적을 깨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언덕 위에 오른 그녀는 박하 향을 뿜으며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너럭바위가 나타났다. 그녀는 평양 집에서 평상에 걸터앉아 보통강물을 내려다보던 때를 생각했다. 언제나 평상 옆에는 모깃불이 지피어져 있었다. 아스라이 먼 곳 강물에서부터 어스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깃불 연기와 냄새가 소리 없이 마당으로 퍼지며 주위가 다소 비현실적인 분위기로 젖어들었다. 딸의 어깨 옆으로 소리 없이 다가온 아버지가 조용한 음성으로 이르고 있었다.

 

"수현아, 머잖아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 군인인 너는 참전해야 할 테지. 너를 빨리 안정시키려고 만경대학원에 보낸 것이 후회가 된다. 전쟁에 나가더라도 이념을 우선하여 사람을 판단하지 마라. 영원한 것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마음은 정신보다 가치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딸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강물에 서려 있는 안개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지금 이 나라는 지나친 사대주의와 개인숭배로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미제와 친일파들이 득실거리는 남조선이 낫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괜찮은 사람이었던 이태준이나 한설야 같은 예술가들마저 이제는 김일성 장군을 입에 담기 바쁘다. 그들은 정신은 명민했는지 몰라도 마음이 아름답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감아 품으며 하늘 위로 성큼 올라와 있는 달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수현이 지금 보는 저 달은 꼭 그때의 달과 닮아 있었다. 문득 아버지가 보고 싶어졌다, 그녀는 지갑을 펼쳐 아버지의 사진을 보았다. 사진 속의 아버지는 성성한 백발과 형형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하얗게 달빛이 번지고 있는 배밭을 내려다보았다. 미풍과 함께 풋풋한 배 향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움막 쪽에서 보인 작은 불빛

 

넓은 배밭 너머로 자그마한 움막이 하나 있었다. 움막을 내려다보던 별 하나가 유달리 반짝거렸다. 그녀는 별과 움막을 번갈아보며 상념에 잠겨들었다. 다른 별들도 이곳저곳에서 갓 파종한 씨앗들처럼 튕클튕클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조금 지나자 하늘의 별들은 마치 시루떡의 검은콩처럼 늘어나더니, 이내 물뿌리개의 구멍들만큼으로 더 많아졌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것들은 밤하늘에 꽉꽉 들어차 버렸다. 그러자 그녀의 속눈썹에도 별빛이 스며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수현은 배밭 너머에서 순간적으로 만들어졌다 사그라지는 작은 불빛을 보게 되었다. 처음 그녀는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이 야산 둔덕에 자기밖에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불빛이 났던 곳을 가늠해 보았다. 그녀는 어두워지기 전 그곳에 움막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하지만 지금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그 사이 짙어진 어둠 때문에 잘 보이지 않게 된 것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본 그녀는 자기가 보았던 것은 움막에서 잠간 사이에 켰다 끈 불빛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저 움막에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최근 인민군에서는 훈령을 내려 정상적인 인가 외에서의 숙식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소리 없이 바위에서 내려왔다. 손가방에서 권총과 손전등을 꺼내 쥔 그녀는 배밭 주위로 우회하여 움막 쪽으로 접근해 갔다. 그녀는 움막 안으로 들어가 손전등으로 전구 선과 소켓을  찾아내 불을 켰다. 움막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구 불빛이 너울거리는 벽에는 옷가지가 걸려 있었고 바닥에는 가마니가 깔려 있었다.  남루한 앉은뱅이책상이 하나 벽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는 수십여 권의 책이 포개지거나 세워져 있었다. 그녀는 책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문제가 될 만한 책은 없어 보였다. 거의 영어로 된 원서였는데, 그녀가 알 수 있는 단어는 고작해야 'THE UNIVERSE'나 'Worlds'나 'Einstein' 정도였다.

 

책상 위의 종이에는 깨알 같은 글씨의 수식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책상서랍을 열어 보았다. 서랍 속의 종이에도 깨알 같은 수식이 마치 난수표처럼 꽉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불온한 것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벽에 만들어지는 권총 든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하는 말소리가 문 쪽에서 들렸다. 그녀는 흠칫 놀라 몸을 돌렸다. 문에 서 있는 남자는 상대가 여자임을 알아 본 것 같았다.

 

"제 방에 불이 켜지기에 들어와 보았습니다."

 

조수현은 너울거리는 백열등 불빛 사이의 얼굴이 누구인지를 알아차렸다, 그는 놀랍게도 화신백화점 사령부 건물 서점에서 본 청년이 틀림없었다.

 

"아니, 동무는 이두오 선생이 아니십니까?"

 

이두오는 조수현의 권총을 보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권총을 들고 있는 여자가 누구인지를 바로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조수현은 슬며시 권총을 핸드백 속에 넣었다. 이두오는 얼굴을 앞으로 내밀며 손을 눈 위로 얹었다. 그러고는 여자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혹시 인민군 장교님, 조....수현?"

"네. 맞습니다. 동무는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이두오는 쑥스러운 듯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갈 데가 없어 여기서 먹고 자고 합니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움막 옆에 있는 마른 여물통에 걸터앉았다. 밤하늘에는 별이 촘촘히 들어차 있었다. 게다가 은은한 배 향기가 퍼져 있었다. 별빛이 조수현의 모시저고리에서 미풍을 만나 사르르 흔들리고 있었다.

 

이두오는 며칠 전 김성식의 집을 찾아간 저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김성식 선생은 저도 조금 압니다."

 

김성식은 이두오에게 자기 집에 함께 있자고 했지만, 누가 되기고 하고 자기도 불편하기도 해서 움막으로 옮겨왔다고 했다.

 

"양식은 선생님께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이두오는 낮에는 책을 읽고 밤에는 별을 보며 살고 있었다. 눈치로 보아 그는 우주 관련 연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덧붙이는 글 | 한국전쟁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역사팩션입니다. 이 소설은 주당 2~3회 게재됩니다.

2009.03.01 15:47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한국전쟁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역사팩션입니다. 이 소설은 주당 2~3회 게재됩니다.
#이태준 #조수현 #이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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