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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미국

[영화평]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미스트>

09.02.25 10:08최종업데이트09.02.25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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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포스터 ⓒ Dimension Films Presents

2008년 1월 국내 개봉한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영화 <미스트>에 대한 평가는 호평과 혹평이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한다. 박진감 넘치는 괴수 영화나 전율이 엄습하는 공포 영화를 기대한 관객들에게 <미스트>는 김 빠진 맥주처럼 2% 부족한 영화로 기억되겠지만 인문ㆍ사회과학적 분석틀로 접근한 관객들에겐 퍼즐 게임처럼 흥미진진한 영화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이 영화가 비교적 단순한 줄거리 안에 복잡하고 무거운 주제(예를 들어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개념, 엘리아스 카네티가 말한 접촉공포, 이라크 전쟁, 집단 광기 등등)들을 밀도 높게 배치해 놓았기 때문인데, 그런 의미에서 <미스트>는 가볍게 눈으로 보고 즐기는 영화라기보다 심층적인 독해(讀解)와 사유가 필요한 텍스트에 더 가깝다.

 

미지의 공포 - 안개

 

"미지의 것에 의한 접촉에서만큼 인간이 두려움을 느끼는 법도 없다. 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잡으려 하는가를 보고자 하고, 알고자 하며, 아니면 적어도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인가를 알 수 있기를 바란다. 어디에서나 인간은 낯선 것에 의한 접촉을 피한다. 밤이나, 아니면 어둠속에서 우리가 갖게 되는 예기치도 못한 접촉에 대한 공포는 패닉(panic)한 상태로까지 상승될 수가 있다."(엘리아스 카네티, <군중과 권력>) 

 

공포소설의 제왕으로 불리는 스티븐 킹과 미지의 공포를 형상화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소재인 안개가 조합되면 과연 어떤 괴물이 탄생할까? 그 대답이 영화 <미스트> 안에 있다. 

 

공포, 괴물 따위가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듯한 평화로운 호숫가 마을 롱레이크에 한바탕 폭풍이 몰아닥친 후 기이한 안개가 마을 안으로 밀려들어온다. 그리고 잠시 후 짙은 안개를 뚫고 피범벅이 된 노인이 달려나와 이렇게 외친다. "안개 속에 무언가가 있다!"

 

공포에 질린 마을 주민들은 안개를 피해 우왕좌왕하다 대형 마트로 몰려들고 때마침 폭풍으로 파손된 집을 수리하기 위해 마트에 들른 주인공 데이빗도 꼼짝없이 발이 묶이고 만다. 이미 마을 전체를 집어삼킨 안개는 마지막 남은 피난처인 대형 마트를 포위하고 서서히 죽음의 촉수를 뻗기 시작한다.

 

안개. 그것은 미지의 공포다. 미지의 것에 의한 접촉을 가장 두려워하는 인간에게 안개는 모든 유형의 공포를 제공한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는 시각적 공포 뿐만 아니라 (안개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언제 안개가 걷힐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불확실성을 통한 심리적 공포까지 유발한다. 농도를 이용해 공포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안개는 어둠이나 밤과 마찬가지로 공포를 이미지화하는 데 효과적인 도구다.

 

영화 <미스트> ⓒ Dimension Films Presents

 

폐쇄 공간에 갇힌 인간 군상이 연출하는 광기와 폭력성

 

그런 의미에서 영화 <미스트>는 공포의 전시장이라 할 만하다. 영화 전편을 뒤덮고 있는 음산한 안개가 미지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면 안개 속에서 튀어나와 인간을 향해 덤벼드는 괴물들은 보다 직접적인 접촉공포를 자극한다. 미지의 공포(안개)가 생명을 위협하는 접촉공포(괴물)로 서서히 전환되는 과정에서 관객들이 체감하는 공포의 수위도 함께 상승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영화 속에서 가장 공포를 자아내는 존재는 안개도, 괴물도 아닌 바로 인간이다. 정체 불명의 안개에 쫓겨 대형 마트에 갇힌 마을 주민들이 실체를 알 수 없는 공포와 대치한다는 설정 역시 인간의 광기와 폭력성에 깃들어 있는 공포를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임을 알 수 있다.

 

안개에 둘러싸여 고립무원의 섬처럼 떠있는 대형마트.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하는 그곳에 출신, 지위, 인종, 이해관계가 제각기 다른 생존자들이 모여들어 운명공동체를 이룬다. 폐쇄 공간에 갇힌 인간 군상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들(<타워링> <포세이돈 어드벤처> 등)이 대개 그렇듯 <미스트>가 그리는 인간 군상 역시 광기와 폭력성으로 얼룩져 있다.

 

안개의 정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낙관론자들은 괴물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한 사람들의 증언을 무시하고 그 와중에 외지인과 현지인들 간의 갈등, 흑백 간의 인종 갈등마저 불거진다. 설상가상으로 괴물의 습격이 시작되자 광신적인 종말론자가 극단적 선악 이분법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려 들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

 

결국 종말론자에 세뇌 당한 마을 주민들은 안개를 신의 저주로 규정하고 이를 잠재울 희생양으로 데이빗(주인공)의 아들을 지목한다. 그러자 데이빗은 집단 광기에 사로잡힌 마을 주민들을 피해 안개 너머 불확실한 희망을 찾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 과정에서 데이빗 일행과 마을 주민들 간에 격투가 벌어지고 마을 주민들을 선동하던 종말론자는 총에 맞아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영화 <미스트> ⓒ Dimension Films Presents

 

미국 사회의 축소판

 

안개에 의해 강제적으로 조성된 대형마트란 폐쇄 공간은 미국 사회의 축소판으로도 볼 수 있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갈등과 대립, 광신적 종말론자의 오만과 독선, 종교적 세뇌에 의한 집단적 광기는 미국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느낌이다.

 

특히 주인공 일행이 불확실한 희망을 찾아 괴물이 득실거리는 안개 속으로 뛰어드는 장면에선 1930년대 대공황기에 제작되었던 영화 <오즈의 마법사>가 머릿속에 오버랩되어 떠오른다. 그러나 불확실성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아 길을 나서는 데이빗 일행의 현실은 대공황기를 용감하게 횡단하던 도로시 일행보다 훨씬 더 암울해 보인다.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지는 안개. 그 속을 활보하는 괴물들. 만약 안개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면 그들에게 탈출구는 없다. 공교롭게도 마지막 순간 차에 탑승한 사람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아들로 구성된 유사 가족의 형태를 띤다. 그로 인해 관객들은 이들이 최후까지 살아남을 거란 기대를 갖게 되지만 마지막 한 방울의 기름이 연소되어 자동차가 멈추는 순간까지도 세상은 여전히 짙은 안개에 싸여 있다.

 

마침내 데이빗은 결심한다. 마치 가족처럼 보이는 나머지 일행들도 데이빗의 제안에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남아 있는 총알은 단 4발 뿐. 데이빗은 자신의 아들을 포함한 4명을 차례로 사살하고 안개 속 괴물들을 향해 울부짖는다. 어서 자기를 죽여 달라고.

 

그러나 그 순간 극적인 반전이 눈앞에 펼쳐진다. 온 세상을 뒤덮은 것 같던 안개가 순식간에 걷히고 그 사이로 군부대가 위풍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카타르시스를 기대하던 관객들에게 극도의 허무주의만 안기고 막을 내린다.

                      

 안개 속에 담긴 진짜 메시지

 

영화 <미스트> ⓒ Dimension Films Presents

<미스트>의 원작은 스티븐 킹의 <스켈레톤 크루>(1985)에 실린 '안개'란 단편소설이다. 이미 영화 <그린 마일> <쇼생크 탈출>을 통해 스티븐 킹 특유의 색깔을 충실히 구현해낸 바 있는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은 <미스트>에선 원작과 전혀 다른 결말을 선보인다.

그로 인해 영화 <미스트>는 원작이 포착할 수 없는 현실(2000년대)에 대해서도 비판적 접근이 가능해졌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현실이란 바로 이라크전쟁을 의미한다.

 

시종일관 화면을 가득 채운 음울한 안개, 주인공이 오열하는 라스트신 위로 울려퍼지는 이슬람풍의 비가(悲歌), 안개가 걷히자 드러나는 군부대의 행렬과 살풍경한 시가(市街)는 혼돈과 광기로 얼룩진 이라크전쟁의 이미지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미국은 약속대로 이라크 국민에게 민주주의를 안겨주었나? 과연 군대가 진정한 구원자가 될 수 있을까? 애초에 안개를 유발하고 괴물들을 불러낸 계기는 다름아닌 군부대의 비밀실험이었다. 따라서 군부대가 안개와 괴물을 제거하고 구세주처럼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은 아이러니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바로 그 허무주의와 아이러니가 없다면 이 영화의 가치와 의미는 퇴색하고 말 것이다.

 

한순간 인간의 감각과 이성을 마비시키고 세상을 폐허로 만드는 안개.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전쟁일 수도 있고 종교적 독단주의일 수도 있다. 어느 쪽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영화에 대한 해석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안개가 걷히고 세상이 예전으로 되돌아간다 해도 주인공 데이빗의 가슴엔 이미 영원히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전쟁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부시정권과 네오콘이 안개처럼 사라졌다고 해서 전쟁의 아픈 기억과 상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미국과 미국으로 인해 길을 잃은 모든 사람들 앞에 다시 새로운 길이 열리는 날은 언제쯤일까?

덧붙이는 글 | <미스트> 원작 - 스티븐 킹, <스켈레톤 크루>, 황금가지, 2006

2009.02.25 10:08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미스트> 원작 - 스티븐 킹, <스켈레톤 크루>, 황금가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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