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만 오면 가슴이 에린다"

[소설-2011 한일합방 8] 1.작전명 '노란토끼'...여우사냥 하편

등록 2008.12.12 09:19수정 2008.12.12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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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 공원에서의 집회가 있던 날로부터 일주일 후인 3월 27일 아침.

 

강대수는 광주 라마다 호텔 꼭대기 층에 위치한 스위트룸에서 광주의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대수는 광주는 건물 몇 개 더 들어선 것 외에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완수야. 나는 말이시. 그 날로부터 30년이 넘게 흘러버린 시방도 광주만 오면 가슴이 에린다. 그라서 나가 광주를 자주 안 오는 것이여. 그라도 여기가 고향인디 말이제. 근디 참 사람이라는게 그렇다. 그러다가도 기댈 데가 필요하면 고향으로 발걸음을 향하재. 어쩌면 나 하나 때문에 고향 사람들이 또 욕 볼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선생님.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강대수는 자신이 죽으면 동작동 국립묘지 대신 광주 망월동 국립 5·18 민주묘지에 묻어줄 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당부하곤 했다. 자신 때문에 30년 넘는 세월을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따돌림 당해온 고향 사람들에게 죽어서라도 속죄를 하고 싶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라고, 나가 부탁한 일들은 어떻게 되가고 있당가?”

 

“지난번 탑골공원 집회의 반응이 좋아서인지 모든게 다 잘 풀려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윤보일 전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덕분에 그동안 우리하고 사이가 좋지 않던 윤 전 대통령 직계 계보 의원들까지 마 총장을 지원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윤 전 대통령은 대구 집회부터는 직접 나서시겠다고 합니다.”

 

“그려. 윤보일이라고 나하고 생각이 다르겄는가. 가만 있기가 힘들 것이여. 그라고. 젊은 친구하고는 약속이 잡혔나?”

 

“한얼 투자 증권 최상태 대표와는 아직 약속을 못 잡았습니다. 정치라는 것 자체를 워낙 싫어하는데다, 그쪽에도 급한 사정이 있는 듯싶습니다. 하지만 대답이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은 걸로 봐서 조만간 만나보실 수 있을 겁니다.”

 

“부담 가질 것 없다고 해. 나는 그냥 왜놈들이 어떤 식으로 자본 수탈을 더 악착같이 해갈라고 하는 건지 그것이 듣고 싶은 것 뿐이니까.”

 

강대수의 수행비서인 김태구가 호텔 방안으로 들어왔다. 집회장소로 이동할 시간이었다.

강대수와 백완수는 김태구를 따라 호텔을 나섰다.

 

구 광주 도청 앞 광장은 집회가 시작되기 한 시간전인데도 이미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광장 곳곳에는 ‘민주화 수호’ ‘문민 독재 타도’ 등의 반 정부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가 나부끼고 있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구호를 외치거나 한동안 듣기 힘들었던 ‘아침이슬’ 같은 옛 민중가요들을 부르고 있었다.

 

가츠는 광장에 모인 사람들 속에 섞여 있었다. 비교적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미리 이곳에 도착했을 ‘사냥개’로부터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을 의심할 사람은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때때로 다른 사람들을 따라 구호를 외치곤 했다.

 

승냥이는 여우가 먹이를 먹고 있을 때 여우 사냥에 나설 계획임. 사냥개가 승냥이를 언제 사냥할지 최종 확인 바람

 

가츠의 핸드폰으로 사냥개로부터의 문자 메시지가 들어왔다.

 

여우 사냥이 끝난 직후 승냥이를 사냥한다. 사냥개의 승냥이 사냥에는 반드시 토끼 떼가 동반되어야 한다

 

가츠는 메시지의 내용을 확인 후 사냥개에게 답신을 보냈다. 그리고 구 도청 앞 광장을 급히 빠져나갔다.

 

가츠가 서 있던 자리는 금세 누군가에 의해 채워졌다. 광장은 이미 구석진 곳에 이르기까지 사람들로 꽉꽉 채워져 가고 있었다.

 

“선생님 시간이 됐습니다."

 

백완수가 집회장 연단 뒤편에 주차된 차 안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강대수를 깨웠다. 강대수가 연단에 오를 시간이었다.

 

“나가 깜박 잠이 들었나 보군. 많이들 모였당가?”

 

“광주인데요. 못 잡아도 십만은 넘을 것 같습니다.”

“광주 사람들만은 아닌 것 같구먼.”

 

“물론입니다. 목포, 여수, 순천 등지에서 학생들은 물론이고 여러 사람들이 버스를 대절해서까지 올라왔다고 합니다.”

 

“많이들 모여준 건 고마운데, 나가 또 고향사람들 한테 큰 죄를 짓는 것 같구먼. 자, 그럼 가보드라고”

 

강대수는 차 문을 열고 집회장 쪽으로 걸어 나갔다.

 

강대수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마이크를 통해 전해지자 광장 곳곳에서 사람들이 함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사람들 중에는 여전히 강대수를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강대수는 장완수의 부축을 받으며 광장 앞쪽에 마련된 연단으로 올라섰다. 최근 들어 무리를 많이 해서 그런지 걸음을 걷기가 더더욱 힘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목소리는 쉬지 않았다. 강대수는 그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강대수가 연단에 올라 마이크 앞에 자리를 잡고 서자 그토록 소란스럽던 광장 곳곳이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친애하는 광주 시민 여러분. 존경하는 전남 도민 여러분. 이 죄 많은 강대수가 또 다시 고향 땅에 내려와 부렀소. 나가 또다시 고향 땅에 내려온 이유는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지라?"

 

여기저기서 ‘문민독재 타도’,’민주 수호’ 등의 구호가 강대수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터져 나왔다.

 

“그라요. 문민의 탈을 쓴 독재가 판을 치고, 친일파 매국노들이 이 나라 금수강산을 또다시왜놈들한테 넘기려고 수작들을 부린께, 우리 광주가 앞장서서 이 못된 짓거리를 막아보자고 나가 또다시 이 자리에 섰소이다. 왜 광주가 앞장서야 하느냐? 여러분이 한번 대답해 보시오. 왜 광주요?”

 

또다시 광장에 모인 사람들 입에서 ‘민주화의 성지’ 등의 대답이 곳곳에서 들려 나왔다. 강대수는 연설을 이어 나가기 위해 손짓으로 다시금 사람들을 조용 시켰다.

 

그런데 연단 앞 누군가의 입에서 예기치 못했던 답변이 튀어 나왔다.

 

“빨갱이 대장이 빨갱이들 땅에서 빨갱이들 모아놓고 헛소리를 지껄여대고 있구나. 누가 매국노냐? 빨갱이들한테 나라 팔아 치우려는 네놈 강대수야말로 매국노 아니더냐?

 

강대수를 비롯한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예기치 못한 소리가 난 장소로 향했다.

 

'탕'

 

순간 총소리가 났고, 강대수가 쓰러졌다. 강대수의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경호원들이 연단 앞을 막아서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40대 중반의 남자가 총을 들고 빠른 속도로 연단 앞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총구가 또 한번 불을 뿜었다. 경호원 한 명이 강대수를 향해 몸을 날려봤지만 허사였다. 또 한발의 총탄은 연단 옆에 쓰러진 강대수의 몸을 관통해 지나갔다.

 

“저 새끼다. 저 새끼가 선생님에게 총을 쐈다. 저 새끼를 죽여버리자.”

 

군중들 속에 있던 30대 중반의 남자가 총을 쏜 중년의 사내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리고 무차별적으로 사내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총을 쏜 남자가 쓰러진 것을 보자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그 남자에게 가세했다. 30대 중반의 남자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잽싸게 꺼내 들었다. 조그마한 손 망치였다. 그는 그걸로 쓰러진 사내의 머리를 빠르게 내리쳤다. 괴이하게도 30대 중반 남자의 입가에는 알 듯 모를듯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2008.12.12 09:19 ⓒ 2008 OhmyNews
#소설 #한일합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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