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인간] 김활란과 장덕수의 친일 경쟁

[김갑수 식민지역사팩션 126] 3부 '열두개의 눈동자'

등록 2008.10.02 10:33수정 2008.10.02 10:34
0
원고료로 응원
일본이 아시아 전쟁을 일으킨 이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3·1운동 이후 유지해 왔던 문화정치를 포기해야 했다. 거기에는 아주 단순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전면적인 중국 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이 일본에 대한 무역을 동결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물자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일찍이 문화정치를 표방하여 계몽주의와 신여성을 미화하고 연애와 퇴폐를 조장한 나머지 식민지 조선은 도시를 중심으로 유행 심리와 소비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부호와 지주의 자녀들은 모던보이, 모던걸이라 하여 향락 분위기를 선도했고 이를 추종하여 가난한 집의 젊은이들까지 허세와 허영에 젖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일본은 본토와 점령지에서 내핍과 절약을 통해 물자 소비를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일본은 전쟁 물자를 적극적으로 얻기 위해 동남아시아를 침공했다. 그들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이름으로 이 침략 전쟁을 위장했다. 그들은 말레이시아를 점령하고 난 후 본토의 학생들에게 고무공을 하나씩 나눠 주었다. 이는 당연히 말레이시아의 고무를 차지했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함이었다.

이 전쟁을 통해 물자를 얻게 된 일본은 확장된 전선을 감당할 병력의 부족에 직면하게 되었다. 사납게 불러 인적 자원이 더 필요해진 것이었다. 그들은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만들어야 징용과 징병을 수월히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결과 사상 유례가 없는 민족말살정책이 시행되었다.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만들어 전쟁에 내보내려면 우선 조선인의 정체성을 없애는 일이 급선무였기 때문이었다.

1938년 7월 1일에 발족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국민정신뿐 아니라 국민의 물리적 행동까지도 규제했다. 행정 단위를 기준으로 결성된 이 연맹은 1970년대에 만들어진 한국의 새마을운동과 성격과 조직이 흡사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조선인의 의식주 생활 전반에 개입하며 근검과 내핍을 강요했다. 또한 그들은 황국신민서사와 궁성요배 여부를 감시하기도 했다.


그들은 수많은 종류의 캠페인을 벌였다. 감사의 날(천황에게), 국어(일본어)의 날, 근로자의 날, 보행의 날, 체육의 날, 근로의 날(방공호 파기, 비행장 닦기), 반성의 날(황국신민으로의 지시를 잘 따랐는지), 저축의 날 등이 제정되었다. 또한 그들은 매월 두 번씩 반상회를 열어 불참자에게는 유· 무형의 손해가 가도록 만들었다.

이 무렵 전국을 순회하며 계몽 강연을 한 사람 중에 김활란이라는 여성이 있었다.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한 그녀에게는 조선인 최초의 여성 박사라는 호사스러운 이력이 늘 따라다녔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앞장 서 지방을 돌며 강연했고 또 강연에서 돌아온 다음에는 으레 그 소감을 써서 발표하곤 했다.

미국에서 김활란에게 구애했다가 실패한 장덕수는 콜롬비아 대학에서 학위를 마치고 1936년 귀국한다. 그는 보성전문 교수와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겸임하면서 이광수, 윤치호 그리고 김활란 등과 친일 경쟁을 벌인다.

그는 부민관에서 열린 시국 강연회에서, '적성국가의 정체'라는 다소 선동적인 제목으로 웅변했다.

"이제 동아민족은 압박과 착취를 당하여 뼈만 남았지만 뼈로써 단결하여 구적(仇敵) 미·영을 타도하자."

이듬해 그는 김활란등의 구미 유학파와 함께 부민관에서 싱가포르 공략 강연회를 개최했다. 놀랍게도 그는 일본제국의 패색이 완연했던 1945년 5월까지도 그 짓을 멈추지 않았다.장덕수는 연단을 우리 안의 맹수처럼 빙빙 돌거나 아니면 청중석 사이를 종횡하면서, 그리고 때로는 울먹이면서, "천황 폐하의 은혜에 죽음으로 보답하자!"고 외쳤다.

"학생 제군 중에는 재학지를 떠나 행방을 감추거나 또 집에 돌아오고 나서도 빨리 학병 지원 수속을 하지 않으며 선배나 뜻있는 사람의 권고까지 피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이렇게 비열하고도 언어도단적이며 또 치욕을 모르는 젊은이가 또 어디 있을까? 나는 오늘날까지 교단에서 교편을 잡고 날마다 제군의 얼굴을 대해 왔거니와 이런 젊은이가 있으리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한국인 연구원 임수경

1940년 새해, 미국 뉴저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Institute for Advanced Study) 연구원 임수경은 몬머스 해변을 산책하고 있었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짙었고 바람이 거칠게 불었다. 이따금씩 파도가 해변으로 무섭게 밀려들었다. 그녀는 바바리코트의 위 단추를 풀어버렸다. 차가운 바람을 더 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해변의 방파 축대를 때린 대서양 물이 그녀의 이마까지 튀겼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유유히 걷고 있었다. 그녀는 강풍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몇 번 손바닥으로 매만져 보았다. 바람이 사납게 치는 해변을 거니는 한 머리 모양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허망한 심정을 가누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제 한 달 반 후면 그녀는 연구소의 방을 비워야 했다. 연구소는 그녀에게 1년 간 자유롭고 풍성한 연구 기회를 제공했다. 그녀에게는 준비하고 있던 회심의 논문이 있었다. 지난 10개월 남짓 그녀는 한 가지 일만 하고 살았는데 그것은 우라늄 붕괴에 관한 연구 실험이었다.

그녀의 연구와 실험은 재작년 가을 이렌 퀴리(퀴리 부인 마리의 딸)가 발표한 가설, '우라늄을 중성자로 때리자 원자번호 57번 원소가 나온 것 같다'는 데에서 출발했다. 물리학자들은 퀴리의 가설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수경은 퀴리의 발표를 전해 듣는 순간 그것은 진실이라고 확신했다. 그녀가 실험에 실패한 횟수는 줄잡아 50번 이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실험 방법에 문제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지 한 번도 퀴리의 가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이틀 전 학술지에 실린 논문을 읽으며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독일 빌헬름 연구소의 오토 한과 그의 조수 슈트라스 만이 공동 저자로 올라 있는 논문 때문이었다. 그들은 임수경과 똑같은 연구를 하고 있었고, 그녀보다 먼저 실험에 성공했음이 틀림없었다.

  우리는 원자 번호가 92인 우라늄이 중성자에 의해 35단계나 낮은 원소로 쪼개질 수 있다는 이렌 퀴리의 가설을 입증하는 데 성공한 것 같다. 이렌 퀴리의 추론은 정당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입증할 수 있었다. 붕괴된 물질의 질량은 우라늄의 절반쯤이며, 그 원소의 성질은 36단계 낮은 원자 번호 56인 바륨이라고 확신한다.

캠퍼스 연구소로 돌아온 임수경은 잔디 위에 낙엽과 눈이 뒤섞여 있는 나무 사이를 거닐었다. 검은 구두는 눈으로 하얗게 범벅되어 있었다. 그녀의 실험도 거의 막바지까지 와 있던 차였다. 연구소 체류를 연기해서라도 실험 결과를 얻으려 했던 그녀는 이제 하루아침에 할 일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후 그녀는 씨익 웃고 나서 흐트러진 머리칼을 매만지더니 숙소를 향해 걸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그녀는 커피를 얹었다. 어두워지고 있는 창유리에 커피 잔을 들고 앉아 있는 자기 모습이 투영되고 있었다. 그녀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말없이 앉아 있기만 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미스 임, 베어드입니다."
"무슨 일이시지요?"
"이번 주말에 미스 임과 식사를 할 수 있겠는지 알아보려고 전화했습니다."

임수경은 일전에 공무 외에는 만날 시간이 없다고 말했음을 베어드에게 상기시켰다. 그녀는, 오늘은 통화를 오래 할 기분도 아니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베어드는 미군 장교였다. 실험 기재 때문에 군부대에 가서 그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임수경은 베어드를 본 첫날부터 그의 성향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온순하고 착하며 예민하지만 단순하고 무식하며 외곬인 서양 남성이었다. 나쁘게 말하면 약간의 사이코 끼가 있는 남자 부류였다. 대체로 그런 남자들 중에 동양 여자를 탐하는 기질이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방이 어두워져 그녀가 불을 켜려고 막 일어났을 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는 거칠게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전화의 주인공은 베어드가 아니었다. 송수화기 속의 사람은 갑자기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고 정중히 말했다. 그러고는 자기가 누구인지 이름을 밝혔다.

임수경은 모든 전화는 예고 없이 하는 법이라고 응대했다. 그러자 그는 약간 장난기 섞인 어조로 저녁은 먹었느냐고 물었다. 임수경은 아직 안 먹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 안 먹었으면 먹은 후에 자기를 좀 만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임수경은 한 시간 이내로 갈 수 있다고 대답했다.

한 시간 후 임수경이 찾아간 곳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연구실이었다.

(계속)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대동아전쟁 #프린스턴고등연구소 #김활란 #장덕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3. 3 [단독] 윤석열 장모 "100억 잔고증명 위조, 또 있다" 법정 증언
  4. 4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5. 5 '휴대폰 통째 저장' 논란... 2시간도 못간 검찰 해명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