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전쟁에서 촛불의 길을 찾아라

동학농민전쟁과 페르시아전쟁으로 본 촛불문화제의 국면

등록 2008.06.21 10:30수정 2008.06.21 10:32
0
원고료로 응원
기득권 보수세력의 예봉을 꺾은 촛불

답답하다. 촛불국면이 좀처럼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촛불 수십 개가 100만 개의 거대한 행렬을 만든 것은 정부뿐만 아니라 미국과 세계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이명박 정부의 실정과 경찰의 과잉 대응이 공헌한 바가 있었지만, 촛불은 구린내 나는 세태를 비틀며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색깔을 달리했다.

이 점이 주효했다. 이를 전쟁에 비유하자면 일단 예봉을 꺾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기득권 세력이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를 거두어 보수의 전성기가 시작될 것이라고 다들 예측하였고, 이에 맞서는 세력들은 연이은 패배로 좌절하고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겨룰 만한 상대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중고등학생들이 이명박을 놀라게 할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시민사회는 촛불문화제를 통해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여주었고 자체적으로 불상사를 예비하기 위한 준비까지 갖추어 대오를 유지했다. 비폭력이라는 명분도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데 공헌했다.

하지만 선봉에서 적의 예봉을 꺾었다고 해서 승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시민사회는 정부나 기득권 세력에 비해서 세(勢)가 약하기 때문에 그들이 진열을 갖추게 된다면 의외로 싱겁게 전쟁이 끝날 수도 있다. 이미 몇몇 부분에서 이러한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 보수 단체들은 촛불시위를 막기 위해서 맞불 시위를 열거나 폭력행사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경찰은 거대한 컨테이너로 시민들의 '물리력'을 사전에 봉쇄했다.

이 시점에서 두 개의 전쟁 역사를 돌아보면서 촛불문화제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한다. 촛불문화제는 상대가 명확한 투쟁이므로, 전쟁의 관점에서 쓴다.

실패한 '동학농민전쟁'


동학농민군과 아테네 연합군은 모두 상대에 비해서 현저하게 세력이 적은 '약자'였다. 이에 맞서는 상대는 관군과 페르시아 대군이다. 하지만 동학농민군은 실패했고, 아테네 연합군은 성공했다. 전쟁의 국면을 살펴보면 그 이유는 명확하다.

동학농민전쟁은 1894년에 일어난 민중의 무장 봉기를 가리킨다. 동학은 서학에 맞선다는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정부의 수탈이었다.

고부는 전라도에서도 으뜸가는 곡창 지대였는데 그 때문에 수탈과 폭정이 잦았다. 군수 조병갑(1844-1911)의 폭정이 심해지자, 1894년 1월에 전봉준(1854년-1895년)과 수백 명의 농민들은 고부 관아로 진격하였다. 이에 놀란 군수 조병갑은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았고, 농민들은 수탈에 앞장섰던 아전을 처단하였다. 하지만 농민군이 사후 대책을 세워 놓지 않아 우물쭈물대는 사이에 관은 회유책을 쓰는 척하면서 관련자들을 혹독히 탄압하는 꼼수를 사용하였다.

이에 분개한 농민들은 다시 군대를 정비하여 관군에 맞섰다. 농민군은 관의 수탈에 고통을 겪고 있는 민심을 기반으로 정읍, 흥덕, 고창, 무장 등을 점령한 데 이어 장성 황룡촌 승리, 전주성 입성까지 파죽지세로 내달았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관군은 완산에 머물면서 발전된 무기로 포격을 하는 한편, 봉기의 직접적 원인이었던 고부군수, 전라감사, 안핵사 등을 징계하였으며 앞으로도 관리의 수탈을 감시하여 징계하겠다는 것을 밝혀 봉기의 명분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해 청군이 이미 당도했고 일본의 군대도 자국민 보호를 위해 출병하였다. 동학군은 이런 상황에 따라 폐정개혁 12개조를 요구하고 전주성에서 철병했으나 이미 끝난 전투였다.

동학 농민군은 탄압과 수탈에 대한 대항이라는 수세적인 탄생배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엄청난 민심의 지지를 기반으로 일어난 이후에도 수세적 성격을 극복하지 못했다. 명분싸움에서 진 것이 첫 번째 패인이다. 동학 농민군이 수탈의 구조적인 모순을 포착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내놓을 수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패인은 상대의 움직임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점이다. 오히려 관군이 농민군의 움직임을 모두 간파하고 복합적인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성공한 '페르시아 전쟁'

a

플루타르크 영웅전은 로마시대의 그리스 역사가이자, 신관인 플루타르코스가 비교영웅전의 형식으로 쓴 책이다. 1권의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전략을 예측해 주도면밀하게 대응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 범우사

페르시아 전쟁(BC 492경~449경)을 보면 그리스 반도의 도시국가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페르시아는 지금으로 따지면 미국이나 중국에 비할 만큼 제국의 면모를 갖춘 국가였다. 이들이 아테네 연합군을 농락하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워 보였다. 하지만 2차례에 걸쳐 벌어진 페르시아 전쟁에서 페르시아는 모두 패하고 만다. 첫 번째 패배는 그 유명한 '마라톤 전쟁'이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전쟁은 두 번째 전쟁(BC480)이다. 플루타르크 영웅전 <테미스토클레스 편>에는 이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연합군의 해군 사령관이었고 그의 상대는 페르시아의 황제 크세륵세스였다. 1차 페르시아 전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병력이 그리스로 당도하자 연합국가들은 모골이 송연해 항복할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리스 연합국가는 이권 다툼이 극도에 달아 내전 상황이었다. 이 때 테미스토텔레스는 두 가지 대책을 세웠다. 첫 번째 대책은 아테네의 시민들을 모두 피신시켜 본격적인 전시 체제를 갖춘 것이다. 한편 이를 명분으로 아테네 연합군을 설득할 수 있었다. '배 200척으로 이루어진 도시'라는 말은 아직도 유명하다.

"우리의 도시는 그리스에 있는 그 어느 도시보다 더 훌륭하오. 그것은 우리의 배 200척으로 이루어진 도시요. 당신이 원한다면 그 배는 당신 나라를 지켜줄 것이오. 그러나 만일 당신들이 전과 같이 우리를 배반하고 줄행랑을 놓는다면 그리스(그리스는 한 국가가 아니라 반도 내의 공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우리 식대로 말하면 '동북아'와 비슷한 개념이다 - 글쓴이주) 사람들 중 오로지 아테네 사람들만이 소중한 영토와 자유가 넘치는 도시를 차지할 수 있을 뿐, 당신네들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연합국가들은 연합군에서 이탈할 생각을 여전히 하고 있었다. 테미스토텔레스는 크세륵세스에게 역정보를 흘려 연합군의 이탈을 막고 '배수진'을 칠 수 있었다.

'그리스 군은 곧 후퇴하고자 한다. 충고하건대 그것을 막는 것이 좋으리라. 그들이 지상군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해전을 통해 전멸시키도록 하라'

크세륵세스는 당연히 뛸듯이 기뻐하여 각 함대 사령관에게 연합군을 완전포위하라고 지시했고, 연합군은 목숨을 걸고 일전을 치르는 수밖에 없었다. 테미스토텔레스는 협소한 지형을 이용하여 페르시아 대군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고 페르시아 해군은 폭풍우와 게릴라 공격에 시달려 수많은 병력을 잃고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테미스토텔레스가 이 때 고안한 세 번째 대책이 전쟁의 성패를 갈랐다. 그는 전쟁이 장기화되면 당연히 패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병력이나 모든 조건을 보았을 때 페르시아가 패배할 확률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테미스토텔레스는 크세륵세스에게 교묘한 심리전을 사용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패배와 좌절을 과도하게 해석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크세륵세스에게 결정적인 밀서를 전달한다.

"그리스 군은 해전에서 이긴 기세를 타고 헬레스폰트로 배를 몰고 가서 거기 있는 부교를 끊어버릴 계획이오. 그러나 테미스토텔레스는 대왕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이 사실을 알려드리는 바이니 대왕께서는 속히 그 다리를 건너 대와의 영토로 돌아가시라고 하오. 그 동안 이 사람은 그리스 군 연합함대가 지체하도록 시간을 벌어드리겠소."

이 말을 들은 크세륵세스는 매우 놀라 황급히 후퇴하고 말았다. 아울러 전쟁에서 테미스토텔레스에게 완전히 놀아난 황제가 되고 말았다.

테미스토텔레스가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전을 종식시키고 강한 상대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낸 점이다. 아테네 국내는 물론 그리스의 연합군을 일치단결시킨 것은 테미스토텔레스의 기지와 리더십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전쟁의 국면을 꿰뚫어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카드와 상대방의 카드를 모두 읽을 수 있었다. 상대방의 카드에 따라서 자신의 카드를 바꿀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해 약한 것을 강하게 보이기도 하고, 상대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상대방이 예측할 수 없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은 전쟁의 가장 중요한 작전이다. 크세륵세스는 테미스토텔레스에게 예측되었기 때문에 패배했고, 테미스토텔레스의 작전은 예측을 불허했기 때문에 승리했다.

물리적인 촛불은 당연히 꺼진다

a

6월 20일 광화문. 한 보수단체의 회원이 우산에 촛불시위를 반대한다는 피켓을 붙여놓고 계단에 앉아 있다. 옆에는 각목이 놓여 있다. 이것은 '의도된 폭력'이다. 촛불을 이전투구의 양상으로 빠뜨리려는 낚시질용 몽둥이인 셈이다. 정부는 이들에게 집회를 허락했다. ⓒ 오승주


촛불세력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촛불문화제의 국면은 여러 모로 볼 때 동학농민전쟁과 유사하며 그 결말도 이와 같을지 우려된다. 정부가 미국과의 협상 결과를 명분으로 내세워 '명분싸움'이 벌어진다면 촛불세력은 수세에 몰릴 수 있다. 청군과 일본군의 역할은 고엽제전우회와 뉴라이트연대가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국은 이들에게 집회허가를 내줌으로써 촛불문화제를 '불법시위'로 보이게 하고, 보수 단체가 폭력적으로 대응할수록 당국은 미소를 짓게 된다. 왜냐하면 촛불세력이 흥분해 폭력으로 대응하면 이전투구의 양상 속으로 이들을 가둬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촛불세력은 국민의 지지를 점점 잃어갈 것이다.

세 번째는 장비다. 살수차와 휴대용 소화기, 대형 컨테이너와 수많은 닭장차로 무장한 경찰을 상대하는 촛불세력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일 수밖에 없다. 촛불세력은 이런 불안 요소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촛불의 성격을 엄밀히 따져보자. 촛불을 일어나게 한 원인을 따져보면 일단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대한 반발이 직접적인 동기였고, 국민들의 지지 역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촛불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수세적인 기반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야당과 학계, 시민단체 등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야 하는 이유다. 만약 이명박 실정이 구조적인 모순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이 모순을 깨뜨릴 대안이 제시돼야 하며, 이명박 실정에 대한 반발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이명박 정부는 포장과 눈속임으로 실정을 감출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반발은 곧 수그러들 것이다. 촛불이 갇힌 프레임이다.

촛불은 비폭력을 무기로 삼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촛불은 물리력이다. 폭력을 쓰지는 않았지만, 초를 들어야 하고 거리로 나가야 하고, 거리행진을 하면서 차량의 이동을 방해하는 모든 움직임이 물리량이다. 하지만 물리력은 한계가 있다. '물리적인 촛불'에 갇힌다면 촛불은 당연히 꺼질 수밖에 없다. 다양한 빛깔로 분출돼 물리적인 한계를 극복해야 촛불이 계속 불붙을 수 있다.

비폭력과 물리력의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지도 관건이다. 촛불이 과연 비폭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도 불안하다. 만약 촛불이 고엽제 전우회 같은 단체와 맞서 폭력을 사용한다면 촛불국면은 매우 빠른 속도로 사그러들 것이다.

촛불이 승리해야 하는 이유

후마니타스의 박상훈 대표는 경향신문, 진보신당 주최로 17일 서울 여의도 진보신당 회의실에서 열린 긴급 시국 대토론회 제2차 ‘촛불집회와 진보정당의 과제’에서 촛불집회로 한국 사회 내의 구조와 제도로서 정치의 보수성이 해체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화될 것으로 예상했다.

1990년과 91년의 5월 정국, 97년 총파업, 2000년 촛불정국, 2004년 탄핵정국 등 대규모 운동의 개입기를 제외하면 나머지 정치의 세계는 계속해서 보수적 독점체제의 지속으로 나타난 것을 주장의 근거다. “광범한 대중적 참여와 운동의 시기에는 어떤 변화라도 가능할 것 같은 집합적 열망의 분출이 일순간 국면을 휩쓸다가도, 어느 순간 상황은 종결되고 탈동원화와 일상화의 주기로 돌아가 버린다”는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싸늘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87년 민주화행쟁 이후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속물화되고 보수화됐는지, 그것도 민주화행쟁을 주도한 사람들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모습을 분명히 보았다. 자신이 386이면서 386을 정말 싫어한다는 우석훈 씨는 <88만원 세대>에서 386을 68세대와 비교해 비판했다. 

프랑스의 68세대와는 달리 386의 자기 결집은 사회에 대한 긍정적 효과를 만들어 다음 세대에게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진화하지 못했다. (중략) 프랑스나 독일과 같은 유럽 국가들의 68세대들이 공교육 체계를 대학까지 연장시키면서 다음 세대들이 보다 다양한 교육의 기회를 가지고 20살에 독립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은 반면 우리나라의 386은 학벌주의와 겨에엘리트주의를 더욱 강화시키는 반작용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중략) 지금 10대와 20대가 맞게 된 조금 황당한 상황들은 사실 이 386세대에게 상당한 역사적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77~178쪽>

내가 가장 우려하는 상황은 '촛불'이 '무덤의 추억'으로 남는 것이다. 우리는 87의 성과를 추억할 뿐, 실패의 폐해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시민들이 꿈꾸는 세상과 변화에 대한 희망은 이미 죽어서 무덤에 묻혔는데, 무덤 앞에서 울면서 그 날의 상황을 추억하지만, 추억은 추억일 뿐이다.  2008년에도 신문지상에서 동일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정론지들은 촛불을 찬양하며 엄청난 지면을 촛불에게 바치고 있다. 촛불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보는 시각이 매우 귀하게 됐다. 100만인 행진이 어떻다는 말인가? 100만인 행진은 그 결과로 연결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모든 상황이 끝나고 다시 속물화된 일상을 살아가면서 '나도 한때는 촛불을 들고 광화문을 누볐지' 하는 초라한 추억으로 자위를 하지 않으려면 이번 전쟁은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거리에서 타오른 물리적인 촛불은 반드시 다른 곳으로 옮겨붙어야 한다.
#촛불문화제 #동학농민전쟁 #페르시아 전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책 놀이 책>,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 <공자, 사람답게 사는 인의 세상을 열다> 이제 세 권째네요. 네 번째는 사마천이 될 듯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니, 소파가 왜 강가에... 섬진강 갔다 놀랐습니다
  2. 2 "일본정치가 큰 위험에 빠질 것 우려해..." 역대급 내부고발
  3. 3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4. 4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5. 5 100만 해병전우회 "군 통수권" 언급하며 윤 대통령 압박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