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과 엉덩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바깽이의 윈난 여행기2] 따리의 고성

등록 2008.02.21 18:29수정 2008.02.21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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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리 고성의 거리 따리의 고성에 들어서면 과거로 돌아간 듯 푸근해진다 ⓒ 박경


문득 불안한 예감이 든다. 바퀴 달린 가방이 애물단지가 되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 우리의 여정은 점점 추운 고원을 향해, 점점 열악한 지역을 향해 계획되어 있었으니.

따리(大理)의 샤관에 도착한 우리는 고성(古城)으로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을 찾았다. 가방을 끌기 불편한 남편은 아예 차도로 내려서며 투덜거린다. 바퀴가 고장 났다는 둥 손잡이가 너무 짧다는 둥, 제 팔 짧은 건 탓하지 않고 멀쩡한 가방 탓만 하고 있다.


아줌마들이 근육맨을 좋아하는 이유

왜 이리 버스 정류장은 안 나타나는지. 뒤에서 따라오는 남편은 연신 구시렁대고, 바람을 가르며 앞서 가던 나도 짜증이 밀려와 팩 돌아본다. 남편이 끌던 가방을 홱 낚아 챈 나는, 메고 있던 배낭을 남편의 등딱지에 던져 버렸다. 바퀴는 지극히 정상이구만. 남편 엉덩이에서 좌우로 뒤뚱거리던 가방은 밀착감 있게 도로 위를 구르며 잘만 따라온다.

난 이래서 나이들수록 점점 힘 센 남자가 그립다.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오로지 힘만 센 남자와 결혼하리라는 터무니없는 상상도 서슴지 않는다. 가방끈만 길면 뭐하나. 가방 하나 제대로 못 드는데. 번쩍번쩍 큰 짐을 옮겨 주고, 마누라 손에 주렁주렁 장바구니 매달지 않게 하는 남자는 그래서 나에게 매력적이다. 하여 내게 있어서 세상의 모든 남편은 두 가지로 구분될 뿐이다. 장바구니를 반기는 남편과 피하는 남편.

왜 모기만 봐도 어머나 하던 처녀가 바퀴벌레 내리찍는 아줌마로 변하는가. 왜 겨드랑이 골 훤하던 처녀가 팔뚝 굵은 아줌마로 변하는가. 왜 아줌마들은 힘센 남자들을 좋아하는가. 사람들은 아줌마들이 젊고 건장한 남자를 좋아하면 눈살을 찌푸리며 음흉한 생각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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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리 고성의 상점들 층층이 쌓아 올린 차(위.오른쪽)와 대리석의 고장답게 대리석 공예품도 흔히 볼 수 있다.(아래 왼쪽) ⓒ 박경


미안하지만 그런 이유는 아니올시다다. 그럼 뭐냐. 젊고 건장한 남자가 아줌마의 잃어버린 여성성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그 단단한 팔뚝으로 무거운 짐 하나 너끈히 들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시시껍절한 상상 하나만으로도 말이다. 나도 한때 여리고 부끄러움 많은 처녀였으며 나도 한때 무거운 건 들지도 못할 만큼 낭창낭창한 허리를 가진 처녀였다는 걸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구정물 같은 일상 속에 푹 빠져 있는 나를 단박에 번쩍 들어 올려 줄 것 같은 환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속삭일 것만 같다. 당신은 여리디 여린 여자니까 여왕처럼 그냥 가만히만 있으라고, 모든 힘드는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시멘트 벽에 못도 내가 박고 , 김치통도 내가 들고, 가구도 내가 옮기겠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바구니는 내 알통에 주렁주렁 걸쳐 주겠다고.

착각에서 돌아오면 눈이 번쩍 뜨인다. 어느새 나는 앞장서서 씩씩하게 걷고 있고 남편과 아이는 새끼 오리처럼 내 처분만 바라며 뒤를 줄줄 따라오고 있으니.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마음 약한 나는 또 눈 녹듯 녹아내리기 일쑤.

에휴, 남자도 똑같은 사람인데 왜 안 힘들겠어.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뭉텅 빠져나간 저 머리털 좀 보라지. 연민모드로 급속히 전환. 일찌감치 내 여성성은 폐기처분하는 게 차라리 속 편한 일. 그래도 재활용으로 분리수거하련다. 언젠가 필요할 때가 있으려니 하는 희망으로.

분노에 대처하는 나의 자세

그런데 왜 이리 버스 정류장은 멀고도 먼가. 안되겠다 싶어 택시를 타기로 한다. 택시운전사는 여자였다. 중국엔 여자 택시운전사가 제법 눈에 띄었다. 우리는 35위안(1위안=133원 정도)으로 약속을 하고, 고성 지도를 보여주며 가고자 하는 숙소를 짚어준다.

금방 알아들은 듯 출발한다. 남한의 4배 면적 윈난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라는 얼하이가 오른쪽으로 스쳐 지나가고, 접이식 문으로 된 중국식 건물들이 고성이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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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족 복장을 한 아가씨들이 관광객과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 박경



그런데 택시운전사는 지나치는 호텔들을 가리킨다. 우리는 가고자 하는 숙소를 명확하게 구체적으로 일러준다. 고성의 남문을 지나쳐 성벽을 따라 돌아가는데 적이 걱정스럽다. 우리가 원하는 곳을 제대로 알고 가는 것인가 싶어서. 말이 영 안 통하니 알 수가 있나.

점점 가까이 가고 있는 건 확실한데, 정확한 위치는 모르는 듯하다. 운전사는 내려서 길을 묻더니 알았다는 듯 자신 있게 다시 차를 몬다. 차가 들어가지 못할 것 같은 골목길을 마구 휘젓고 다닌다. 점점 불안해진다. 마침내 막다른 길처럼 철문이 닫힌 곳에 이른다. 다시 돌아나가야 할 판.

그런데 이 아줌마 운전사, 자기 사전엔 퇴보란 있을 수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나 나가 고여 놓은 돌을 밀치고 철문을 열어제끼고는 다시 전진. 그렇게까지 길을 개척해 가며 나아가는 걸로 봐서는 목적지를 분명히 알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좀처럼 우리가 찾는 게스트 하우스는 보이질 않는다.

어느 뒷골목에서 택시는 섰다. 아무리 둘러봐도 아닌 것 같다. 운전사는 차에서 내려 건물 의 뒷문으로 들어간다. 나도 따라 들어갔다. 앞으로 가서 보면 이 건물이 맞을라나 싶은 생각에 열심히 따라가 본다. 좁은 통로와 계단을 지나고 나니 1층의 프런트가 보이고 밖으로 나가 간판을 확인했지만 아니다. 들어와 프런트에 있는 호텔직원에게 우리가 찾는 게스트 하우스를 물으니 모른단다. 그렇다면 이 부근도 아니란 말인가.

다시 택시 운전사를 따라 택시가 있는 곳까지 갔다. 운전사는 이 근처 어디라고 계속 주장하는 듯하다. 은근히 부아가 나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더는 믿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미 주판알도 튕겨 놓았다. 이렇게 골목골목을 휘젓고 다니며 건물 뒷문으로 들락날락거리게 해놓고 설마 35위안을 다 받을 심보는 아니겠지. 나는 화가 났다는 시위를 하듯 잔뜩 인상을 쓰면서 30위안만 내밀었다.

운전사는 쏼라쏼라 항의를 한다. 나는 또 선선히 5위안을 마저 주었다. 말이 안 통하니 뭐라고 더 따지기도 그렇고, 골목길을 누빈 아줌마 운전사의 수고를 무시하기에도 마음이 좀 걸려서였다. 여행이 거듭되면서 이런 종류의 일에는 점점 너그러워지고 있는 내 자신을 느끼게 된다. 마음을 다스리게 되는 법도 배우게 된다.

여행을 마치고 시간이 흐른 후, 아무것도 아닌 일에 분노했거나 별것도 아닌 일에 연연해했던 걸 돌이켜 보고는, 내가 왜 그랬을까 으으으 머리를 벽에 짓찧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현재 여행지에서의 나를 여행이 끝난 미래의 내가 바라보고 있는 걸 종종 발견하게 된다.

화가 잔뜩 난 나에게 미래의 내가 위로한다. 시간 지나면 별거 아니거든. 쓸데없는 일로 여행 기분 잡칠 필요 없거든. 말하자면 그 순간을 지배하는 얄팍한 감정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그건 마치 악몽 속에서 이건 꿈일 뿐이야, 스스로를 위로하듯 찰나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그러다 보면 화가 나려다가도 쏙 들어가 버릴 때가 있다. 마음이 상하려다가도 대범해지는 때가 있다. 이쯤 되면 경지에 이르렀다 할 수 있으니, 스스로가 대견해지고 우쭐해질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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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크젖으로 만든 밍밍하면서도 퍽퍽한 맛의 간식과(위.왼쪽) 방금 쪄낸 듯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위. 오른쪽). 골목에서는 간단히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노천식당을 종종 볼 수 있다.(아래.오른쪽) ⓒ 박경


대범해진 마음으로 가방을 끌고 골목을 빠져 나와 보니, 우리가 선 곳은 따리 고성의 주요도로 양인가와 복흥가가 마주치는 곳, 우리가 찾는 숙소 바로 근처였다.

둘러보니 몇 미터 앞에 게스트 하우스가 보인다. 낯이 익어 고개를 살짝 외로 꼬고 올려다보니, 방금 전에 뒷문으로 들어갔던 바로 그 호텔이다. 우리는 바로 그 뒷골목에서 헤매었던 것이다.

보라. 택시 운전사에게 5위안을 마저 주지 않았다면 당장 오늘밤 호텔방 벽은 내 머리통 무게를 못 이기고 금이 빠지직 갔을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바로 지척에다 두고도 내가 게스트 하우스를 발견하지 못한 건 그렇다치더라도 바로 앞에 있는 건물을 모른다고 시치미 뚝 뗀 호텔 직원의 태도다.

따리의 첫인상

어쨌든 우리 가족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숙소에 짐을 풀고 그 1층에서 벌써부터 그리운 한국음식을 주문했다. 된장찌개와 비빔밥. 딸은 늘 그렇듯이 음식만은 영 적응이 느리다.

하기사 입만큼 보수적이고 폐쇄적이고 독점적인 것도 없는 셈이다. 옛날 먹던 맛만 줄기차게 찾게 되니 보수적이고, 웬만큼 입맛에 안 맞으면 입을 열려고도 들지 않으니 폐쇄적이고, 산해진미 맛있는 음식으로 배불려 놓으면 만사 오케이 다른 어떤 욕심 들지 않으니 독점적이다. 그리하여 오로지 먹는 것만 찾아다니는 걸로도 만족하는 이들이 있지 않은가. 맛나고 귀한 것 먹은 것만으로도 세상을 얻은 듯 아무것도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듯.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가족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 이번 중국 여행은 더 그랬다. 하루가 멀다 하고 한국음식을 찾아 다녔고 우리에게 먹는다는 행위는, 그 지역의 특성을 파악하고 다양한 음식에 대한 이해와 존중, 나아가서 음식을 둘러싸고 있는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이해한다는 데에 닿아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생명유지를 위한, 돌아다니려면 체력이 중요하다는 원초적 욕구에 닿아 있을 뿐이었으니.

그런데 한국음식마저도 마음껏 먹을 수가 없었다. 왜 이리도 식당들은 지저분한지. 테이블에 깔린 패브릭은 여기저기 얼룩져 있고, 숟가락과 포크에는 음식찌꺼기가 말라붙어 있기 일쑤다. 아무래도 다음 중국 여행 때에는 수저를 챙기고 다니는 걸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판. 딸은 이미 입맛을 잃어버렸다. 배꼽시계가 누구보다 정확하던 아이는, 사흘 나흘이 지나면서 배고프다는 말을 잊어버린 것처럼 끼니를 챙기려 들지 않았다.

입과 엉덩이의 거리가 이리도 멀다니. 싸는 것은 그리도 잘 적응하면서 먹는 것은 왜 그리도 적응이 더뎠는지. 먹고 싸는 일이 이렇게 다르구나. 입과 엉덩이가 천리나 떨어졌다고 딸을 놀려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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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리의 고성 역사적으로 윈난성 제일의 중심도시는 따리였다. 당대와 송대에 걸쳐 전성기를 누린 남조국과 따리국의 수도가 이곳 따리에 있었다. ⓒ 박경



오후 시간은 가볍게 따리 고성을 산책하기로 한다. 일 년 내내 봄 날씨라는 쿤밍만큼은 아니지만 겨울날씨라고 하기에는 어림도 없다. 벚꽃이 바람에 날린다. 12월의 붉은 벚꽃이 눈처럼 날린다. 거리 한쪽엔 아담한 화초들이 삼열 횡대로 가지런히 줄을 선 채 손님을 기다리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시냇물 같은 물길이 운치 있게 지나간다.

고즈넉한 따리의 오후는 관광지답지 않게 차분하고 고요하다. 가끔 바람만이 소리를 내며 스칠 뿐. 어떤 여행자는, 여독을 풀고 편안히 쉴 수 있는 곳으로, 광시성 구이린의 양숴와 윈난성의 따리를 꼽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귀모양의 얼하이 호수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평야가 펼쳐지고 사면은 산으로 싸여 있어 북쪽의 샹관과 남쪽의 샤관만 막으면 완전히 봉쇄되는 명당 자리가 바로 이곳 따리다.

남조국과 따리국을 세우면서 전성기를 맞았던 바이족[白族]은 신석기 시대부터 따리 얼하이에 터전을 잡았으며 한자를 기초로 한 자신들만의 문자를 지닌 역사 오랜 민족이다. 그들은 불교와 도교를 흡수했지만 하나의 형태로 강요하지 않고 하나됨을 유지하도록 존중했으며 한족을 대하는 입장에서도 '원수'라든지 '배척'이라든지 하는 말은 천년 동안 단 한번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흥망성쇠의 역사를 겪었을 테고 밀려오는 이민족과의 투쟁 속에서도 의연히 소수민족으로서의 삶을 지키고 살아온 것을 보면 삶에 대해 경건한 마음마저 든다.

작은 꽃들을 사랑하고, 거스르지 않고 조화롭게 물길을 낼 줄 아는 사람들. 이곳 사람들이 금방 좋아질 것만 같은 예감이 바람처럼 휘감고 돈다.

덧붙이는 글 | 2007년 12월 13일 떠나 중국 윈난을 여행하고 12월 24일에 돌아왔습니다.


덧붙이는 글 2007년 12월 13일 떠나 중국 윈난을 여행하고 12월 24일에 돌아왔습니다.
#윈난 따리 #운남 대리 #따리의 고성 #바깽이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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