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주자에게 줄을 서야 미래가 있다

[태종 이방원 156]양녕대군의 남자들

등록 2007.09.07 14:22수정 2007.09.07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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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여인의 어깨선에 내려앉았다. 우유 빛 피부가 눈부시다.

한양에 도착한 이승은 이법화에게 어리 도착 사실을 알렸다. 소식을 접한 양녕은 마음이 급해졌다. 양귀비도 울고 간다는 그 여자를 빨리 만나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세자궁에 갇혀 있는 몸. 뾰쪽한 방법이 없었다. 안절부절 서성이는 양녕에게 이법화가 귀엣말을 속삭였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양녕은 이오방이 미리 마련해둔 대나무다리(竹橋)를 이용하여 창덕궁 담장을 넘었다. 세자가 채신없이 궁궐 담장을 넘은 것이다. 양녕은 이승의 집으로 한달음에 걸어가 어리를 내 놓으라 요구했다. 임금과 세자는 가마나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이 예법이었지만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이법화의 청탁을 받아 어리를 데려오긴 했지만 이승은 한 발 주춤했다. 뒷일이 두렵고 무서웠다.

"세자 저하! 아니 되옵니다."
"냉큼 내놓지 못하고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느냐?"
세자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있었다. 심호흡을 가다듬은 이승이 어리를 불러냈다.

아닌 밤중에 불려나온 어리는 역시 천하의 미색이었다. 오뚝한 콧날, 도톰한 입술, 칠흑같이 검은 머리, 세자 양녕이 좋아하는 미인이었다. 특히 양녕이 옹녀의 징표로 알고 있는 올이 굵은 머리카락의 소유자였다. 몸이 후끈 달은 양녕은 어리를 납치하다시피 데리고 이법화의 집으로 갔다. 오늘날 같으면 호텔로 직행했겠지만 그 옛날에는 그러한 유숙시설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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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침실. 국립민속박물관 ⓒ 이정근


이법화의 집에 때아닌 신방이 차려졌다. 선남선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첫날밤이 아닌가. 이법화의 부인이 금침을 깔고 사향을 뿌리며 요란을 떨었다.


하늘에는 별들이 속삭이는 밤. 지게문 사이로 스며들어온 달빛이 어리의 어깨선에 내려앉았다. 옥을 깎아 놓은듯한 우윳빛 피부가 눈부시다.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달빛이 잘룩한 허리로 흘러내린다. 달빛이 간지러웠을까. 뒤트는 자태에 젖무덤이 출렁인다. 수줍어 고개 숙인 어리의 귀밑머리가 유난히 검어 보인다. 고혹적이다. 검은 고혹이 바람을 일으켰을까. 신방을 밝혀주던 등불이 꺼졌다.

문밖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이오방과 이법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리가 '옹녀' 역할을 충실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뿌듯했다. 뭔가 와르르 쏟아질 것 같고 대박이 터질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마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이법화의 부인 얼굴이 민망한 듯 붉어졌다.

한편, 세자 일행이 스치고 지나 간 이승의 집에 무거운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너무나 뜻밖에 엄청난 일을 저지른 이승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아버지의 여자를 꾀어내어 세자에게 바쳤지 않았는가. '이 일이 탄로 나면 모두가 죽음이다'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어리를 품에 안은 양녕은 너무 좋았다. 얼굴만 예쁜 것이 아니라 몸이 좋았다.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타는 불같은 밤이었다. 이법화의 집에서 꿈같은 시간을 보낸 양녕은 동이 트기 전, 어리를 데리고 궁으로 돌아왔다. 세자궁에 돌아온 양녕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승에게 활(弓)을 보내고 어리는 이승의 처에게 비단을 보냈다. 입막음이었다.

사건의 빌미는 처가에서 터졌다

사건이 터진 것은 공교롭게도 양녕의 처가에서 터졌다. 양녕의 장인은 김한로다. 태종 이방원의 과거 동방(同榜)이다. 김한로가 수석으로 합격했고 이방원은 7등으로 턱걸이 했다. 2등으로 합격한 심효생은 방석의 장인이 되었다가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칼날에 사라졌다.

김한로의 집에는 소근동이라는 가노(家奴)가 있었다. 주인을 잘 만나 전별감(殿別監)이라는 관직을 꿰어 찬 소근동은 수사비(水賜婢)를 희롱하다 말썽을 일으켰다. 오늘날로 해석하면 성희롱 사건이다. 수사비는 후대에 무수리로 불리는 계집종으로 궁중 나인(內人)에게 세숫물과 발 닦는 물을 수발하는 여자다.

불똥이 자신에게 튈 것을 염려한 김한로가 소근동 사건을 임금에게 보고했다. 임금은 내관(內官) 최한에게 심문하도록 했다. 내사 차원이다.

"수사비를 희롱한 네 죄를 네가 알고 있으렷다?"
"높으신 분이 사대부집 첩을 후리는 것은 죄가 안 되고 저 같은 소인이 수사비를 희롱한 것은 죄가 된다는 말씀입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
"도성에 쫙 퍼진 소문도 모르고 계십니까? 세자 저하께서 전 중추 곽선의 첩을 보쌈했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내관 최한의 보고를 받은 태종은 경악했다. 후사를 이어갈 세자가 글공부는 하지 않고 엽색 행각을 하고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지엄한 지위에 있어야 할 세자가 한량패들과 어울려 놀아나고 있다니 기가 막혔다. 백성들의 존경을 받아야 할 세자가 시정잡배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우선 사실여부를 파악해야겠다고 생각한 태종은 의금부에 명하여 철저히 조사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판관(判官) 이승, 소윤(小尹) 권보, 악공(樂工) 이오방, 이법화, 환자(宦者-내시) 김기 등 연루자들이 순군옥에 투옥되었다. 이승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세자께서 말씀하기를 '빨리 어리를 내라'하시므로 제가 부득이 그 말을 좇았습니다. 세자께서 데리고 가신 그 뒤로는 신도 그가 간 곳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큰일을 어째서 계문(啓聞)하지 않았느냐?"
"계문하고자 하였으나 권보가 와서 말리면서 말하기를 '네가 계달(啓達)하는 것은 속담에 누이 주고 매형께 호소하는 것과 같다'하기에 신이 어찌할 바를 몰라 즉시 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어 이법화에 대한 심문이 계속되었다.

이오방과 구오방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세자 저하를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
"우리야 악기를 연주하는 아랫것들로서 구오방이 불러서 갔습니다."
"구오방이 무엇이냐?"
"도성에는 임오방(任五方)·구오방(具五方)하는 한량 패거리들이 있는데 이들이 도성 여자들을 모조리 후린다고 하여 십방(十方)이라고 비웃기도 합니다."
"임오방은 누구이고 구오방은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임오방은 대호군 임군례가 대장 노릇을 하고 구오방은 구종수가 우두머리입니다."

당시 한양에는 무인을 주축으로 한 임오방이라는 한량 패거리가 있었고 문인을 구성원으로 한 구오방이라는 한량 집단이 있었다. 구종수는 문무를 넘나드는 마당발이었다. 처음에는 삼청동 계곡이나 옥류동 계곡에 모여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한담을 나누던 친목 모임이 기생을 희롱하는 여흥을 넘어 양갓집 규수나 혼인한 아낙을 후리는 모임으로 변질되었다.

"구종수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숨김없이 말하라."
"구종수의 집에 도착하니 세자 저하를 모시고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세자 저하가 계시더라는 말은 틀림없으렷다?"

심문관은 귀를 의심했다. 세자가 은밀히 사가(私家)에 나가 잔치에 참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자 저하를 모시고 구종수 구종지 구종유 삼형제와 박혁인 방복생 그리고 기생 초궁장과 승목단이 있었습니다."
"있었던 일을 소상히 말하라."
"세자 저하와 박희(博戲-바둑)를 하고 있던 구종수가 우리들이 들어가자 이오방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타게 하면서 술을 마셨습니다. 술을 마시던 구종수가 일어나 구종유와 춤을 추며 비파를 탔습니다. 구종수가 '오늘 일은 꿈만 같습니다'라고 말하니 세자 저하께서 옷을 벗어 구종수에게 주었습니다."
"그 다음은?"

너무나 뜻밖의 상황에 심문받는 피의자보다 심문관이 오히려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취흥이 익어갈 무렵, 구종수가 자기의 부인을 불러내어 세자 저하께 술을 올리도록 하고 구종지, 구종수, 구종유는 갓을 벗고 열 번도 더 절을 했습니다. 술자리가 파할 때 구종수의 부인이 초궁장에게 저사(紵絲-모시)로 만든 옷을 주고 승목단에게는 면포를 주었습니다. 이오방과 소인에게는 정포(正布)를 주어 받아왔습니다."

사건의 윤곽이 드러났다. 그러니까 이번 어리 사건이 터지기 훨씬 전부터 구종서는 세자궁에 수시로 드나들며 세자와 함께 밤을 보냈고 세자를 밖으로 불러내어 잔치를 베풀고 여자를 바쳤던 것이다. 구종서는 세자의 술친구이며 비공식 채홍사였다.
#어리 #채홍사 #양녕대군 #세자 #성추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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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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