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개화한 집안에서 자라
공산정권 강화되자 남하

[이 사람] 여성·환경운동의 대모 박영숙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등록 2007.07.11 09:48수정 2007.07.11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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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여성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박영숙 이사장.
ⓒ 여성신문
[김현옥 객원기자·작가] 날이 너무 더워 푹푹 찌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6월의 여름이 야속하기만 한 날, 무거운 솜처럼 느껴지는 몸으로 여성재단을 찾아 올라가니 옷이 푹신 젖는다. 좁은 사무실에 옹기종기 앉아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이들의 상기된 얼굴이 나를 보더니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내게 다가와 시원한 물을 마시라고 권한다. 일이 분주해 보이는데도 찾아오는 이에게 다사로운 관심을 갖는 그들의 마음의 여유 한 자락이 내게 넓은 부채처럼 바람을 일으킨다. 좋다.

시원한 남빛 정장을 입고 머리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박영숙(75) 이사장님이 도착하신다.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 5분 전에.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평화로운 미소를 보내신다.

평안남도 평양에서 일제 폭압기에 탄생
모친 "亂中에 태어나 難 속에서 사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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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당시 박 이사장의 아버지. ⓒ 여성신문

나이도, 직책도, 살아온 화려한 경력도 느껴지지 않는, 오이냉국처럼 소박하고 시원한 선생님의 모습이 젖었던 몸을 식혀주는 것 같았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게재한다고 하니 소녀처럼 웃으시며 '당당하고 겸허하게' 말하신다.

"나는 시민사회운동가, 활동가, 여성운동가로 살아온 사람이라서 그 부분은 할 말이 있을 수 있는데 다른 것은 뭐가 있을까?"
"亂中에 태어나 難 속에서 사는 아이"라고 어머니가 그러셨다 한다.

일본 군부와 우익은 만주의 이권을 차지하려고 1931년 9월18일 류탸오거우 사건(柳條溝事件, 만철폭파사건)을 조작해 류탸오거우에서 스스로 만철 선로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측 소행으로 몰아갔다. 그리고 만철 연선에서 북만주로 일거에 군사행동을 개시하던 1932년, 그는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과 만주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다시 평양의 정의여학교, 전라남도 광주의 전남여고를 거쳐 이화여대를 졸업했다. 역동적이고 다사다난했던 민족의 역사를 개인사 안에서 충분히 발현한 민족 증인의 삶을 산 활동가이다.

개화된 집안에서 기독교문화 접하며 성장
9세 때 부친 사망으로 첫번째 큰 상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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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만주에서 평양으로 귀향하여 정의여중을 다닐 때의 모습. 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박 이사장 ⓒ 여성신문

조선시대 가장 차별을 받았던 평양은 어느 곳보다 일찍 개화한 곳이었다. 박영숙의 부모도 서양문물의 선진화에 눈뜬 평양 사람이었다. 자신들은 기독교인이 되지 않았지만 기독교가 교육과 의료에 앞선 문화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그 부유함을 누릴 줄 아는 개화인이었다.

그들은 자녀교육에 도움을 준다고 믿었던 교회에 자녀들을 기꺼이 보냈고, 자녀들이 병치레를 할 때마다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병원을 찾으며 새로운 문물에 몸과 마음을 열었던 개화된 집이었다. 아버지보다 2살 위였던 어머니는 6남매를 3살 터울로 나셨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까지는 전업주부였다. 아버지는 도요타 회사의 대체에너지를 연구하던 연구원이었다.

박영숙의 집은 평양의 중심가였던 대동강변 수동이었다. 그곳은 중국 호떡집들과 중국 상인들이 많아 번창하기도 했던 곳인 동시에 일제 강점기로 인해 중국 사람들이 차별받던 곳이기도 했다. 민족차별이 당연시 여겨지던 시절, 선의의 거짓말이 난무하던 시절의 어수선함이 성장기 아이들의 내면을 차지하던 불운의 시기이기도 했다.

만주에서 중국인들이 조선 사람을 때려죽였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은 평양에 있던 중국 상인들을 때려죽이는 폭력사태를 일으킬 정도의 민족적인 끈을 느끼게 하는 반면, 일본의 강한 식민정책으로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던 혼돈의 시대였다.

박영숙이 9살 되던 해 29세이던 아버지가 장이 잘못되어서 돌아가셨는데 아마 암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 병을 고치기 위해 6남매를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천지사방을 찾아다녔지만 결국 아버지는 서울 청량리 병원에서 숨을 거두셨다.

"아버지의 사망이 내겐 첫번째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어머니가 6명의 아이를 데리고 과부가 되셔서 가족을 책임지게 되어 암담한 현실에 놓이자 아버지 회사 중역이 찾아와 자녀 둘을 사장 댁에 양자로 들여보내라고 권했다. 공부를 많이 하지 않으셨던 어머니, 그는 세상 경험도 별로 없는 젊은 과부였지만 아이들의 의견을 물은 후 결정하겠다고 하셨다. 그것이 내게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아이들이 모두 어머니와 함께 있겠다고 해서 아무도 양자로 보내지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에게 큰 축복이었던 것 같다."

양자로 보내면 아이들에게 보장된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 상황에서 아이들을 지켜낸 것이나, 딸들을 애보기로 보내는 것은 당시에 너무나 흔한 상황이었는데도 가정이 어렵다고 딸들을 다른 집 애보기로 보내지 않은 어머니의 현명한 처사는 가족의 울타리를 굳건히 지켜낸 여전사의 모습이었다.

"여성의식이 언제부터 생겼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데, 나는 사회적으로 활동하기 이전에는 차별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지역의 분위기도 그랬지만 집 분위기는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것이었다. 호떡을 사와도 똑같이 나누고, 밥을 푸는 것도 아버지 것을 먼저 푸고 자녀들은 태어난 순서대로 했다."

한명도 양자 안보내고 6남매 키운 어머니
잠시 만주로 이사갔다 해방직후 평양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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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공립여자중학교 5학년 재학 당시 모습으로, 위에서 둘째줄 왼쪽 두번째가 박 이사장이다. ⓒ 여성신문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외할머니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만주에 사는 친할머니에게 경제적 도움을 받기 위해 자주 만주를 왕래하셨다. 친할머니는 만주에서 양조장에 누룩을 대는 회사를 운영하시는 부자였다. 우리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 즈음 만주로 아주 이사를 했다. 해방 되던 해 만주에서 동영소학교를 졸업한 뒤 중학교 입학 준비를 했다. 만주에는 중학교가 일본계와 중국계뿐이어서 나는 일본계 학교에 지원했다."

면접에서 시험관들은 박영숙에게 "가츠키가 있어서 입학시킬 수 없다"는 판정을 내렸다. '가츠키'란 말은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심성을 말하는 것인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에게서 융통성 없고 물러서지 않는 내면의 성향을 보았던 것 같다.

"해방이 되자마자 보따리 보따리 꾸려 길림에서 남포진을 거쳐 수십개의 터널을 지나며 조선으로 돌아왔다. 아직도 기억에 선명한 것은 수십개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기차 안에 있던 대부분 조선인 승객들은 목적지에 이르기 전에 모든 것을 수탈당했다는 것이다. 중국인 기관사는 터널마다 멈춰서 승객들에게 돈을 요구했는데 일본 치하에서 조선인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며 근근이 생명 유지를 했던 억울함에 대한 분풀이였던 것 같다."

당시 일본인은 1등급 파란 통장, 조선인은 2등급 노란 통장, 중국인은 3등급 붉은 통장을 이용해야 했다.

배급품도 달랐다. 일본인은 설탕과 생과자도 받을 수 있고, 조선인은 그것을 제외하고 받았으며, 중국인은 생존에 필요한 정도의 물품만을 받으며 극심한 차별을 받았다.

평양으로 돌아오자 평양은 함경도 말을 쓰는 사람들이 관장하고 주도권을 잡고 있었으며, 이미 예전의 평양이 아니었다. 평양에 있던 서문여학교, 정의여학교, 숭의여학교 등 3개의 여학교에는 공산당이 들어와 서문을 제1, 정의를 제2, 숭의를 제3 여학교로 개명을 했고, 박영숙은 제2 여학교인 정의여학교에 입학했다.

정의여학교 시절, 주말마다 마스게임에 불려나가 연습을 강요당했다. 정의학교는 3·1절 때 마스게임을 거부하는 데모를 했다. 퇴학당할 것을 각오하고 마스게임을 거부하며 강당에 모여 마지막에 애국가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는데, 지금도 애국가를 부르면 그때 기억 때문에 눈물이 난단다.

정세가 어수선하고 공산정권이 점점 강화되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월남하기로 결심, 남쪽에 있던 작은 아버지를 만나러 다녔다. 작은 아버지는 군인이었는데 광복 직후 평양에 잠깐 머물다 국군을 창설하기 위해 남한으로 내려갔다.

공산정권 강화되자 다시 천신만고 끝 남하
이화여대 영문과에 진학…'인생의 봄'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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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대학생 시절 대한YWCA연합회 활동 모습으로, 둘째줄 중앙 검은색 옷 입은 이가 박 이사장. ⓒ 여성신문

어머니는 가족들을 남쪽으로 내려보내기 위해 3개 조를 짰고, 박영숙은 첫번째 조로 막내여동생과 이웃집 할머니와 더불어 안내원을 따라 내려왔다. 안내원은 웬일인지 아이들 편에 보내는 모든 돈을 자신에게 맡겨야만 자신을 신뢰하는 것으로 알고 안내할 수 있다고 했다. 어린 두 딸을 낯선 안내인에게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은 숯검정이 되었겠지만 내색을 안하셨다.

한참을 가다가 어디엔가 정차하는 틈을 타 판자로 막은 기차 창문을 살며시 열고 밖을 살피다가 순시하는 군인과 눈이 마주쳐 결국 내리는 역에서 체포되는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 안내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군인들 처소로 끌려간 그들은 박영숙의 재치 있는 대답과 임기응변으로 다시 풀려났다.

밖은 이미 어두워지고 수중에 돈 한푼 없이 나선 박영숙은 피곤함과 공포로 몸이 졸아드는 것 같았는데, 순간 어둠 저편에 그 안내원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들을 버리지 않고 기다렸던 안내원 덕에 삼팔선을 무사히 넘었고, 그에 대한 기억은 사람에 대한 신뢰를 깊게 하는 좋은 추억이 되었다.

당당하게 서서 붉은 색 부채를 들고 자식들을 배웅하던 어머니의 불안함은 기차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모습에서 느껴졌다. 딸들의 안위를 염려하는 지극한 모성은 박영숙의 눈에 붉은 한 점으로 비춰졌다.

가족들이 모두 무사히 삼팔선을 넘어온 뒤 16사단 사단장으로 근무하던 작은 아버지의 근무처 전남 광주로 내려가 그곳에서 전남여고를 다녔다. 당시 전남여고는 6년제였고 박영숙은 4학년으로 편입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평민당 부총재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박영숙이 광주 출신이어서 김대중의 사람이 되었다"는 말을 했었다.

박영숙은 책임감이 강하고 융통성보다는 충실함이 내재된 사람이었다. 둘째딸이면서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족들을 책임질 의무를 어머니와 함께 지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래서 젊고 아름다운 과부 어머니를 남정네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감시하기도 했다 한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어머니께 미안해진다고 말한다. 그러한 책임감은 전남여고 시절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의과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작은 아버지는 의사는 고생이 너무 많으니 과를 바꾸라고 충고했고, 다시 진학 준비를 하여 영문과로 진학하는 바람에 대학을 2년이나 늦게 입학하게 되었다.

이제 박영숙의 봄은 이화여자대학 시절에 활짝 꽃 피었다.
#박영숙 #만주 #월남 #정의여고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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