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개혁 종착점, 무학대사 끌어내리기

[태종 이방원 107] 자초와 무학대사

등록 2007.06.18 21:50수정 2007.06.20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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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유교를 이념으로 한 국가다. 건국 주역 역시 성리학 신봉자들이다. 건국 초기 국가 기틀의 뼈대를 마련한 정도전이 억불숭유(抑佛崇儒)정책을 내놓았지만 불교개혁을 완수하지 못했다. 불교를 혁파하지 못하면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태종 이방원은 불교 개혁에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전국의 사찰을 통폐합하고 사찰이 가지고 있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여 국가에 귀속시켰다. 승려들의 경행을 금지하고 도성 출입을 엄단했다. 풍속범죄를 저지른 승려를 일벌백계 차원에서 단죄하고 군대에 징집했다.

급변하는 정세에 당혹감과 충격을 받은 백성은 신통력과 요술을 부리는 도사가 나타나 악인(惡人)을 응징해주기를 기대했다. 이러한 민중 심리는 불교를 끌어들여 높은 기대치를 부여했다. 영웅을 기다리는 백성이 도교와 결합시킨 불교는 본의 아니게 수많은 우상을 양산했다. 이러한 백성의 기대 심리에 영합한 승려도 없지 않았으나 본질적으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도 어쩌면 피해자인지 모른다.

강공 일변도의 불교 개혁이 종착점에 왔다. 이제 남은 것은 불교적인 우상을 깨는 것이다. 사간원에서 불교개혁을 마무리 짓는 상소가 올라왔다. 불교 개혁의 총사령탑 하륜이 마련한 예정된 수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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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 회암사에 있는 무학대사 부도탑 ⓒ 이정근

"자초(自超)는 천례(賤隷)에서 나와 살아서도 취(取)할 것이 없고 죽어서도 이상한 자취가 없사온데 전하께서 그가 일찍이 왕사(王師)가 되었다 하여 예조(禮曹)로 하여금 부도(浮屠), 안탑(安塔), 법호(法號), 조파(祖派), 비명(碑銘) 등을 상정(詳定)하게 하시니 전하의 전일(前日)의 뜻에 어긋나는가 합니다."-<태종실록>

자초, 즉 무학대사는 출신이 천출이고 죽어서도 사리가 나오지 않았으니 별 볼일 없는 그저 그런 사람이라는 뜻이다. 태조 이성계의 왕사가 되었다 하여 평범한 사람에게 부도탑을 세워주고 법호를 내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얘기다. 또한 불교개혁을 일관되게 추진하는 임금의 정책과도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이것은 나의 뜻이 아니고 상왕(上王)의 명령을 받은 것뿐이다."

태종 이방원은 한발을 뺐다. 공연한 변명은 아니다. 무학대사를 왕사로 모신 태조 이성계는 대사 생전에 부도탑을 세워주고 존경을 표했다.

"중 자초(自超)가 왕사(王師)의 이름을 분수없이 받았으므로 식자(識者)들이 비방할 뿐만 아니라 그 무리들도 또한 비소(非笑)합니다. 죽을 때는 미쳐서 신음(呻吟)하고 통곡(痛哭)하여 보통 사람과 다를 것이 없었고 다비(茶毗)한 뒤에도 이상한 자취가 없었습니다."

무학대사는 학문이 높고 고고한 인격을 갖추어 왕사가 된 것이 아니라 태조 이성계와 사사로운 친분관계로 왕사를 받았으니 지식인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고 동료 승려들마저 비웃고 있다는 뜻이다. 그가 죽을 때는 보통 사람과 다름없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통곡했고 결정적인 증거는 그의 시신에서 사리가 나오지 않았으니 보통의 승려라는 것이다.

"본원에서 입탑(入塔), 시호(諡號), 탑명(塔名), 조파(祖派), 비명(碑銘) 등을 파(罷)하자고 청하여 윤허를 받았사온데 지금 그의 문도들이 임의로 해골을 안치하고 방자하게 광탄한 일을 행하여 밝은 시대를 더럽히니 그 죄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令)을 내려 직첩을 거두고 죄상을 국문하여 율(律)에 따라 논죄하고 소재관으로 하여금 그 탑묘를 헐어버리고 그 해골을 흩어버리게 하소서."-<태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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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대사 ⓒ 이정근

무학대사 영혼에 비수를 꽂았다. 무학대사는 보통 사람과 똑같이 죽음 앞에 두려워했고 시신에서 사리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학대사에 꽂힌 비수는 그대로 불교에 꽂혔다. 불교 개혁이 종착점에 다다른 것이다.

승려이면서 왕사였던 무학대사 해체 작업의 신호탄이다. 백성의 우상이었던 무학대사를 해체하여 저잣거리로 끌어내겠다는 것이다.

백성은 단순하다. 백성은 미래지향적인 청사진보다도 영웅 까발림에 환호한다. 한 마리 학처럼 고고했던 존경의 대상이 해체되어 자신과 같다는 것이 확인되었을 때 자신의 죄업에 대한 면죄부를 받는 듯한 착각에 빠지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요즈음 회자되고 있는 네거티브도 그 범주에 속한다. 백성들의 가슴에 새겨진 우상을 해체하는 것은 통치술의 하나다.

자초는 1327년 고려 충숙왕 14년에 경상도 합천 상기에서 농부 박인일의 아들로 태어났다. 17세에 출가하여 소지(小止)의 제자가 되었으며 혜명국사(慧明國師)로부터 불법을 배웠다. 진주 길상사(吉祥寺)와 묘향산 금강굴(金剛窟)에 머물며 능엄경(楞嚴經)을 파고들던 그는 더 깊은 불도를 배우기 위하여 원나라 연도(燕都)에 갔다. 여기에서 그의 스승 나옹을 만났다.

자초는 일반 백성들에게 무학대사라고 더 알려져 있다. 자초에 대한 설화가 기록되어 있는 순오지, 대동기문, 지봉유설, 연려실기술 등에는 많은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이거나 사실과 다른 내용이 많다. 분명 경상도 합천 상기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그의 탄생지는 여러 곳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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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당. 국사당은 무신(巫神)을 모시는 제당으로 굿을 행하는 곳이다. 무학대사를 모시고 있으며 인왕산에 있다. ⓒ 이정근

우선 간월도 얘기를 들어보자. 자초의 어머니가 처녀시절 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큼직한 오이 한 개가 떠내려 왔다. 그 처녀는 오이가 하도 먹음직해서 건져 먹었다. 빨래를 하러 갔다가 물에 떠내려 오는 오이를 먹고 처녀로서 아이를 잉태하여 낳게 되자 그 부모가 아비 없는 아이라고 내다 버렸는데 학이 날개로 보호하여 구출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호가 무학이라는 것이다.

학돌재는 더 구체적이다. 무학 대사가 어머니 엄씨의 태중에 있을 때 부친이 나라의 빚을 많이 졌는데 빚을 갚을 길이 없어 피신했다. 이에 사령이 부인을 대신 호송하여 서산 현감 앞으로 가던 중 갑자기 산기를 느껴 마침내 길에서 몸을 풀고 아기를 낳았다. 핏덩이를 옷가지로 덮어두고 부인을 끌고 간 사령이 관아에 당도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현감이 '인간의 도리가 어찌 이럴 수 있느냐?'며 곧 사령을 아기 있는 곳으로 보냈다. 그곳에는 커다란 학 한 마리가 두 날개로 아기를 보호하고 있었다. 사령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현감은 아기 이름을 무학이라 지어 주었다. 뒤에 사람들이 무학 스님이 태어난 곳을 학돌재라고 부르고 있다. 학돌재는 충남 서산 인지면 모월리에 있다.

귀국하여 나옹이 머물던 천성산 원효암을 찾아갔을 때 법통을 전하는 표시로 불자(拂子)를 주었다. 이때부터 나옹과 자초는 사승(師僧)관계가 성립되었다. 그 뒤 나옹이 머물던 신광사를 찾아갔으나 나옹을 따르던 제자들과 마찰을 일으켜 고달산에 들어가 암자를 짓고 혼자 살았다.

회암사를 크게 중창한 나옹이 입적하자 자초는 명산을 유유하는 선승이 되어 전국을 만행(卍行)하다 설봉산 토굴에서 면벽수행 중 태조 이성계와 운명적으로 만났다. 이성계가 고려를 멸하고 조선 초대 임금으로 등극하자 그는 왕사가 되었다. 천도 후보지로 계룡산을 천거했으나 공사 중 취소되었으며 그 후 인왕산을 천거했으나 성리학자 정도전의 논리에 밀려 결실을 맺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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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지 발굴현장 ⓒ 이정근

왕자의 난을 거치며 가슴앓이를 하고 있던 태조 이성계의 말벗이 되어주던 자초는 회암사에서 나와 금강산 진불암(眞佛庵)으로 들어가 여생을 보내다 78세를 일기로 금강암(金剛庵)에서 입적했다. 법랍 62세였다.

저서로는 인공음(印空吟) 1권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으며 무학대사어록(無學大師語錄) 1권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무학비결(無學秘訣)이라는 필사본이 있으나 자초에게 가탁된 위서(僞書)라는 설이 있다. 현존하는 저서로는 순천 송광사에 소장되어 있는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가 있다.

자초 해체작업에 착수한 사간원(司諫院)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불씨(佛氏)의 교(敎)는 국가에 무익하나 우리나라에서는 이에 미혹됨이 더 심합니다. 백성들이 제 마음대로 머리 깎는 것을 나라에서 엄금하지 아니하므로 그 무리가 번성하여 사찰(寺刹)이 산과 들에서 서로 바라보고 더구나 근자에는 중들이 그 스승의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고 불법(不法)을 자행합니다."

이후 배불정책은 일관되게 추진되어 조선 5백여년 동안 이어져 왔다. 조상을 가정으로 모신 신주가 개인적인 유교 정책이라면 불교 혁파는 정치적인 유교 정책이었다. 인간 본연의 도덕성을 강조하는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채택했을 때 불교는 버려야 할 유산이었다. 불교 개혁을 마무리 한 태종 이방원은 훗날 이렇게 술회했다.

"불씨(佛氏)의 도(道)는 그 내력이 오래 되니 나는 헐뜯지도 않고 칭찬하지도 않으려 하나 그 도(道)를 다하는 사람이면 나는 마땅히 존경하여 섬기겠다. 지난날에 승(僧) 자초(自超)는 사람들이 모두 숭앙하였으나 끝내 그는 득도(得道)한 경험이 없었다. 이와 같은 무리를 나는 노상의 행인과 같이 본다."-<태종실록>
#무학대사 #자초 #국사 #왕사 #회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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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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