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의 엇박자

[태종 이방원 103] 회암사의 영화와 몰락

등록 2007.06.12 10:01수정 2007.06.12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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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대사 부도탑. 태조 이성계가 존경을 표하기 위하여 무학대사 생전에 조성한 부도탑에는 난간석이 있고 용 문양이 양각되어 있다. ⓒ 이정근

의정부(議政府)에서 사찰의 토지와 승려를 혁파할 것을 골자로 하는 대책을 내놓았다. 선교(禪敎) 각 종파를 합하여 남겨 둘 사찰을 제외한 나머지 사찰은 폐쇄하자는 내용이었다.

"조계종(曹溪宗)과 총지종(摠持宗)은 합하여 70사(寺)를 남기고 천태종(天台宗) 소자종(疏字宗) 법사종(法事宗)은 합하여 43사(寺)를 남길 것입니다. 화엄종(華嚴宗) 도문종(道文宗)은 합하여 43사(寺)를 남기고 자은종(慈恩宗)은 36사(寺)를 남길 것입니다. 중도종(中道宗) 신인종(神印宗)은 합하여 30사(寺)를 남기고 남산종(南山宗) 시흥종(始興宗)은 각각 10사(寺)를 남길 것입니다." - <태종실록>

전국의 사찰을 통폐합하고 나머지가 이정도이니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이 간다. 태종 이방원은 의정부의 계획안을 그대로 시행하라 명했다. 대대적인 불교 개혁이다. 그런데 의외의 곳에서 문제가 터졌다. 아버지 태조 이성계다. 태상왕이 회암사(檜巖寺)에 거둥하여 반야경(般若經)을 옮겨 놓으려 하자 태조 이성계를 호종한 환자(宦者-내시)가 불교는 개혁 대상이므로 그만 두기를 정중히 청했다.

이에 격노한 태조 이성계가 환자 김문후, 김중귀, 김수징를 내치고 문을 닫아걸어 버렸다. 아들의 정책에 아버지가 우회적으로 농성하는 사태가 회암사에서 발생한 것이다. 보고를 받은 태종 이방원은 지신사 황희를 보내어 아버지의 노여움을 풀어드리고 회암사는 별도로 관리하라고 명했다.

"회암사(檜巖寺)는 그(道)에 뜻이 있어 승도들이 모이는 곳이니 예외로 함이 가하다. 전지(田地) 1백 결과 노비 50구를 더 급여하라. 표훈사(表訓寺)와 유점사(楡岾寺)도 또한 회암사의 예로 하여 그 원속전(原屬田)과 노비는 예전 그대로 두고 감하지 말라."- <태종실록>

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애정을 갖고 있는 회암사는 개혁 대상에서 제외하고 오히려 지원을 늘리라는 얘기다. 이렇게 권력의 비호를 받은 회암사는 조선 초기 국내 최대의 사찰로 성장했다. 한때는 상주 승려의 수가 3천명을 상회했던 대형 사찰이다.

앞으로 가는 아들과 뒤로 가는 아버지

회암사 아랫마을 고읍리에 주민들을 위한 장터가 있었다. 백성들의 생활용품과 정보가 유통되던 5일장이다. 장터는 지역 주민들보다 전국의 승려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각종 불교 서적과 용품들이 있기 때문이다. 장터는 전국 최대의 승려 장으로 번창했다. 장터에서 스님들이 만나면 목례를 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회암사 스님이 낯선 스님을 만났다.

"어디에서 오신 스님이신지요?"

동안거 하안거 때면 용맹정진하기 위하여 전국의 사찰을 떠도는 것이 스님이라 만나면 반가웠다.

"회암사에 있습니다. 스님은 어디서 오셨는지요?"

같은 사찰에 있으면서도 서로 얼굴을 모를 정도로 스님이 많았다는 얘기다.

회암사는 경기도 양주 천보산 아래 삼산양수(三山兩水)의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삼산 양수란 천보산이 안산으로 삼고 있는 삼각산과 임진강 한강을 말한다. 고려시대 인도에서 들어온 지공(指空) 스님에 의하여 266칸 사찰로 중창된 회암사는 나옹(懶翁)선사와 무학대사를 거치면서 대규모 사찰로 거듭났다.

공민왕에게 설법한 나옹선사는 국사(國師)였고 무학대사는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였다. 이들은 임제종(臨濟宗) 계통의 사승(師承) 관계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가 살아 있을 때 회암사에 부도탑을 조성하여 높은 존경을 표시했다.

회암사는 태조 이성계가 왕좌(王座)를 내어놓고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 궁실역할을 했던 특별한 사찰이었다. 무인(武人)과 사찰.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만남이다. 불교는 살생을 금한다. 무인은 살생이 주업이다. 그렇지만 만나서 서로에게 주고받는다. 무인은 자신의 죄업에 대한 위안을 받고 사찰은 비호를 받는다.

무인은 적을 만나면 먼저 죽이고 그 다음에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죽기 때문이다. 성리학자는 상대를 죽이기 전에 심사숙고 하지만 죽이고 난 후에는 자신의 행동이 옳았다고 논리적으로 합리화 한다. 때문에 속죄하는 마음이 생겨도 성리학자는 사찰을 찾지 않지만 무인은 사찰을 찾는다. 자신의 행동에 위안을 받기 위해서다. 백담사를 찾은 전통도 예외는 아니다.

권력은 불(火)이련가? 밀랍으로 날개를 붙이고 권력에 가까이 접근했던 회암사는 명종시대 문정왕후의 총애를 받아 승려 신분으로 오늘날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병조판서를 지낸 보우 스님을 정점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명종 조는 임꺽정이 등장하는 등 사회는 혼란스러웠지만 유학이 꽃피우던 시대다. 정몽주, 길재,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지던 학풍이 퇴계 이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제시한 기대승 등 걸출한 학자를 배출하며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한마디로 영자의 전성시대가 아니라 공자의 전성시대였다.

유교의 전성시대에 사라진 회암사

정몽주와 조광조는 유생들의 우상이었다. 사칠이기론(四七理氣論)으로 스승 이황의 찬사를 받았던 기대승이 조광조 추증을 건의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루지 못한 꿈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성리학은 인간학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학이다. 관계를 정립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공고히 하려는 것이 성리학이다. 유생들은 도덕적으로 고결한 선인을 흠모했다.

전국의 유생들이 회암사를 그냥 놓아둘 리 없었다. 회암사는 모든 유생들의 공적이었다. 제주도에서 유배생활 하던 보우를 제주목사가 때려 죽여도 처벌받기커녕 잘했다고 환호 일색이었다. 법률적 판단을 배제한 다중심리에 의한 타살이었다. 회암사가 사라지던 무렵 명종실록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다.

"금년 봄에 송도(松都)의 유생이 음사(淫祠)를 태워버린 뒤로 사방에서 그것을 본받은 유림(儒林)들이 한갓 혈기와 용맹으로 방자한 행동을 일삼고 있다. 소문을 들으니 양주 회암사를 불태우려고 한다. 대사성으로 하여금 관학 유생에게 알아듣도록 타이르게 하라." - <명종실록>

흥분한 유생을 만류하라는 내용이지만 그 후 아무런 기록이 없다. 누가 언제 회암사를 불태웠는지 남겨진 기록 없이 회암사는 사라졌다. 유생들이 송도의 음사(淫祠)를 불태웠다는 사실을 열거한 것으로 보아 사찰에 대한 유생들의 공격은 전국적이었던 같다. 조일전쟁(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선조 28년 군기시(軍器寺)시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회암사 옛터에 큰 종이 있는데 불에 탔으나 이것을 가져다 화포를 주조하는데 쓰면 별로 구애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훈련도감도 주철이 부족하니 그 군인들과 힘을 합해 실어다 조총을 주조하는데 나누어 쓰면 참으로 편리하겠습니다." - <선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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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지 발굴현장. 뒤에 보이는 것이 천보산이다. ⓒ 이정근

흙 속에 파묻혀 문헌상으로만 남아있던 회암사는 1964년에 그 존재가 확인되고 1997년도부터 본격 발굴 진행 중이다. 출토된 불상이 하나같이 목이 잘리고 한군데 묻혀있는 것으로 보아 실화에 의한 단순 화제가 아니라 방화에 의한 소실이라는 추측이 무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회암사지 발굴 현장에서 청기와 파편이 발견되고 깜깜한 밤에도 송진을 태워 불을 밝히는 정료대(庭燎臺)가 발굴되었다. 또한 월대(月臺)에 태극문양이 있는 것으로 보아 회암사는 사찰 이상의 궁실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당시 청기와는 금(金) 못지않게 귀한 물건이었다. 청기와의 색깔을 말하는 회회청(回回靑)이라는 낱말이 암시하듯이 청기와 안료는 이슬람권에서 수입한 귀한 재료였다. 궁궐에도 함부로 얹지 못하고 창덕궁 선정전(宣政殿)에만 남아있다. 청기와가 얼마나 귀한 물건이었으면 전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권방위가 청기와를 빼돌려 팔아먹으려다 사헌부에 적발되어 귀양 가기도 했다.

의정부에서 입안한 불교 개혁이 시행되자 불교계가 반발하고 나섰다. 조계사(曹溪寺) 중 성민(省敏)이 하륜을 찾아와 절의 수를 줄이고 노비와 전지를 삭감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원상회복을 요구했다. 하륜이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성민이 승려들 수백 명을 이끌고 와서 신문고를 쳤다. 오늘날의 집단 시위다.
#천보산 #회암사 #무학대사 #삼산양수 #나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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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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