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화장실에 스페어 화장지가 있는 이유

약자에 대한 배려는 화장실에서부터

등록 2007.06.02 12:29수정 2007.06.02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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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화장실 화장지걸이 옆에는 항상 화장지가 하나 더 대기하고 있습니다. 여유분인 것이죠. 소위 '스페어' 화장지인 셈이죠. 아, 그거 있잖아요.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 나면 언제 어디서나 갈아 낄 수 있도록 준비해 두는 타이어를 '스페어 타이어'라고 하잖아요. 그것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스페어 화장지'를 말하는 겁니다.

그 스페어 화장지가 생긴 유래는 우리 집 막내둥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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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오마이뉴스에 '[코믹포토] 일곱살 '바다'의 쾌변 표정'이란 제목으로 올라간 막내아들아이의 사진이다. ⓒ 송상호

"아빠. 아빠."
"야. 너 바지도 올리지 않고 어기적어기적 그게 뭐냐?"
"화장실에 화장지가 다 떨어져서 그래요."

큰 볼일을 보던 아들아이가 화장지가 없어서 바지를 올리지도 못하고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한편은 우습기도 하고 한편은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아니 미안한 마음이 더 들었습니다. 입만 열면 "약자를 배려할 줄 아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라고 외치던 내가 정작 우리 집에서 제일 약자인 막내 아들아이는 배려해주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화장지가 떨어지면 막내아들은 볼일을 마칠 수가 없었습니다. 화장실 수납장에 든 화장지에 키가 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 나는 항상 화장실 수납장에 있는 화장지 하나를 화장지걸이에 갖다 두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이런 작은 실천 하나부터 집에서 해야겠다는 다짐에서뿐만 아니라 아들아이에 대한 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여느 개인 가정집이 다 그렇듯 욕실과 화장실이 같이 있다 보니 개방된 자리에 화장지를 많이 못 가져다 두는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화장지 여러 개를 손닿을 곳에 두지 못하는 아쉬움을 막내 아들아이가 이해해주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나의 아내도 어느새 '스페어 화장지'를 챙기는 것에 동참합니다. '배려 바이러스 감염'이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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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믹포토에 게재된 또 다른 쾌변 장면. ⓒ 송상호

그렇다고 여러분 오해하지는 마세요. 우리 집은 아이들이 불편해할까 봐 이것도 챙겨주고 저것도 챙겨주는 집은 아니랍니다. 그동안 내가 써왔던 글에도 밝혔듯이 부모가 해야 할 가장 본원적인 책무가 '아이들의 홀로서기를 전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실천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홀로서기를 가르치려면 먼저 남을 배려하는 법부터 알아야 할 거라는 생각에서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서로의 배려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잖아요. 특히나 어느 사회나 공동체에서 있게 마련인 약자에 대한 배려는 우리 모두가 익혀야 할 필수적인 생활양식이 아니겠어요.

더군다나 막내 아이가 다른 것도 아닌 배설하는 것에서부터 불편함을 느낀다면 세상을 보는 눈이 얼마나 어려워질까 싶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누구에게나 만족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죠.

하여튼 아빠와 엄마의 이런 배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막내아들 아이는 화장실에 들어가 신나는 '큰 볼일 보기' 한판을 벌이고 있네요.
#송상호목사 #더아모의집 #스페어화장지 #화장지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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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목사질 하다가 재미없어 교회를 접고, 이젠 세상과 우주를 상대로 목회하는 목사로 산다. 안성 더아모의집 목사인 나는 삶과 책을 통해 목회를 한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문명패러독스],[모든 종교는 구라다], [학교시대는 끝났다],[우리아이절대교회보내지마라],[예수의 콤플렉스],[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겨],[자녀독립만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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