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의 여인들은 어떻게 됐을까

[이야기가 있는 문화기행 63] 정업원은 사찰일까? 아닐까?

등록 2007.05.20 14:39수정 2007.05.20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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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향원정, 경복궁은 조선개국 초 법궁이었다. ⓒ 이정근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펼치며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불교가 탄압을 받았다. 고려를 폐하고 조선을 건국한 혁명세력은 불교를 고려 패망 원인의 하나로 지목했다.

왕실과 결탁한 신돈이 정치질서를 어지럽혔고 전국에 산재한 불교사찰이 과분한 토지를 소유하여 백성들을 노예처럼 부렸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재산을 편취하였기 때문이다.

"이단을 물리치기 위하여 나라에서 사찰을 폐하였으나 내원당(內願堂)과 정업원(淨業院)만은 혁파하지 못했으니 왕명을 내려 주소서."

사간원이 태종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 이에 임금은 내원당은 폐하고 정업원은 그대로 두라고 명했다. 중종 17년에는 이러한 기록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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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 ⓒ 이정근


"중 각령(覺靈)이 세속의 의복차림을 하고서 말을 타고 도성 안을 돌아다니다 정업원(淨業院)의 여승 원일(元一)과 묘심(妙心)을 간음했기 때문에 칼과 수갑을 채워 하옥했습니다. 원일과 묘심을 불러 조사를 해야 하나 폐주(廢主-연산군)의 후궁(後宮)이던 곽씨가 정업원 주지로 있어 본부(本府)가 함부로 불러다 조사하기가 미안하기 때문에 감히 아룁니다."-<중종실록>

사헌부(司憲府)의 보고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강화도에 위리안치되고 세상이 바뀌었지만 폐주의 후궁마저 권력기관 사헌부가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것이 권력의 후광이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정업원은 사찰 아닌 사찰 같은 여자들만의 성역이었나 보다.

장안의 기녀와 미녀들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은 연산이 채홍사(採紅使)를 팔도에 풀어 수많은 여자들을 궁녀라는 이름으로 잡아들인 연산시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궁으로 끌려 왔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다. 이계동과 임숭재의 눈에 띈 것이 불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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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묘. 폐위되었기에 왕릉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도봉산자락 방학동에 쓸쓸이 잠들어 있다. ⓒ 이정근

여염집 아녀자들로서는 욕심이 채워지지 않은 연산. 시집가지 않은 여자들을 청녀(靑女)라 지목하고 채청사(採靑使)라는 새로운 직책을 만들어 사대부와 사족의 규수들을 끌어갔으니 원성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채홍사로 성가를 드높인 이계동과 임숭재는 우찬성과 장악원제조였다던가. 그들은 지하에서 편히 잠들었을까?

연산 폐위 이후 이들 여인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궁에 들어간 여자들은 왕과 동침을 했든 안 했든 혼사 길이 막혔다. 집으로 돌아가도 가족들로부터 냉대를 받았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작부로 흘러가게 방치하는 것은 사대부들의 정서에 어긋났다. 궁여지책이 정업원이었다.

성리학을 신봉하는 조선의 사대부들은 자신을 거쳐 간 여인들이 다른 사내의 품에 안기는 것을 자존심 상해했다. 칠거지악이라는 이름으로 내치기는 했지만 개가(改嫁)는 금기시했다. 하물며 임금의 품에 안겼던 여인들이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것을 방치한다는 것은 임금을 주군으로 모시는 자신들의 존재의의에 손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정업원 #채홍사 #채청사 #내원당 #각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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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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