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2 13:17최종 업데이트 20.04.02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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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문 한해수 관련 법원 판결문 ⓒ 박만순

 
"야아, 이게 뭐라고 쓴 거라냐?"
"어무이, 뭐 때문에 그러십니까?"


한금선이 어머니로부터 받은 우편물은 일반우편물이 아니었다. 법원의 도장이 찍힌 것으로 이들 모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것임에 틀림없다. 봉투를 뜯어 한 자 한 자 읽는 딸 얼굴이 점차 굳어지는 것이 노모의 얼굴에도 읽혔다.


"야아, 와 그러노?" 한금선은 대답을 않고 끝까지 읽었다. 마지막 문구까지 읽고서야 그녀는 우편물을 집어 던지며 통곡을 했다. "아이고, 아버지!" 두 주먹으로 방바닥과 가슴을 번갈아 가며 쳤다. 딸 옆에 엉거주춤 있는 김귀순은 '뭔가 안 좋은 소식인가 보구나'라고 짐작하며, 빨갱이 아내로 살아 온 60년의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한 시간 가량을 통곡한 한금선은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했다.

"어무이, 법원에서 아버지 재판을 기각처리 했다뿝니다."
"거 뭔 소리고?"
"우리가 재판에서 졌다고요."
"...."


김귀순 역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법원의 판결문은 다음과 같다.
 
'증언자의 "한해수가 1949년 4월경 마을 청년들과 함께 연행된 후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한국전쟁 발발 후 군인들에게 총살되었다"고 진술하는 사실은 인정된다'

여기까지 읽으면, 한해수가 한국전쟁기에 대전 산내에서 불법적으로 학살되었음을 법원에서도 인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다음 문구가 앞의 판단을 180도 뒤집는다.
 
'그러나 한해수가 마을에서 체포된 이유가 불분명하고, (같은 마을 주민의) 증언만으로 대전형무소사건의 희생자라고 볼 수는 없다'
 
위 판결문은 2015년 1월 15일 서울지방법원에서 결정한 것이다. 이에 앞서 진실화해위원회는 '한해수는 한국전쟁기에 불법적으로 학살되었다'고 진실규명 결정하였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즉, 사법부가 진실화해위원회의 '확인' 결정을 믿을 수 없다고 반기를 든 것이다.
  
지키지 못한 약속

"어무이 아가 많이 컸지요?"
"야아 몸은 괜찮노?"
"어무이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괜찮다고 대답한 한해수의 몰골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철창을 사이로 어머니와 아들은 말보다 울음을 더 주고받았다. "면회 끝"하는 간수의 소리와 함께 벨 소리가 났다. 한해수는 엉거주춤 일어나는 어머니에게 "어무이 아가 많이 컸지요?"하고 물었다. "면회 끝났다는 소리 못 들었소!"라는 간수의 고함소리에 어머니는 말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1박2일의 면회 길은 너무나 멀었다. 창원에서 출발해 하룻밤을 대전에서 자고, 아침 일찍 면회를 신청했다. 면회를 마치고 서둘렀지만 집에 도착한 것은 저녁이 되어서였다.

가족과 친지, 마을 사람들이 한해수 집에 모여 들었다. "금선이 할무이 면회하느라 고생했어요." "금선이 아부지는 잘 있어요?"라는 질문이 그녀가 마루에 엉덩이를 붙이기도 전에 쏟아졌다. 자식의 상한 얼굴을 이야기하다가, 면회 끝에 아들이 한 얘기를 전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한마디 했다. "아이구, 금선이 아버지가 애기가 보구 싶은가보네." "다음에는 금선이 엄마랑 금선이도 데리고 가소."

마을 아낙네들의 댓거리에 그제서야 한해수 어머니 성복아는 자기가 실수했다는 것을 알았다. 아들이 '아내와 아기가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를 미처 생각 못한 자신의 불찰이 그제서야 생각 난 것이다.

"아가, 다음엔 꼭 같이 가자"며 성복아는 며느리 김귀순을 위로했다. "야 어무이." 다음 면회는 모내기를 마치고 6월 말경에 하기로 약정을 했다. 그런데 그 약정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해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졌기 때문이다. 나중에 들리는 소식이 "형무소에 있던 이들이 모두 산내 커다란 구덩이에 모두 휩쓸려가 죽었다요"라는 것이었다.

지리산 입산자의 거짓고백

'쾅쾅'하는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김귀순은 '새벽에 누가 문을 두드리나?'라는 생각을 하며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경찰들은 구둣발을 신은 채 안방으로 들어갔다. 경찰이 왔음을 직감한 한해수는 뒷문을 박차고 담을 뛰어넘으려 했다.

하지만 뒤따라온 경찰의 손길이 더 빨랐다. 결국 한해수는 1949년 4월 경찰에 연행되었고 재판을 통해 1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은 사실은 성복아가 면회 갔을 때 아들이 이야기한 것이다(한금선 증언).

성복아는 대전형무소로 이감한 아들 면회를 몇 차례 다녀왔다. 아들이 부탁한 검정고무신과 철학책, <토정비결>을 구매해 감방에 넣어주기도 했다.

그렇다면 한해수는 왜 경찰에 연행되어 구속되었을까? 김귀순(91세. 경남 창원시 동읍 송정리)이 시어머니 성복아에게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지리산으로 도망가던 팽○○가 경찰에게 잡혔는데, 경찰의 고문으로 네 남편을 불었다"는 것이다.

한해수가 정확하게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한해수가 한국전쟁 직전 경찰에 연행되어 감옥에 간 것만은 분명하다. 당시 같은 마을에 살았던 최점년(91세. 경남 창원시 동읍 송정리)도 70여 년 전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한해수씨는 제 남편과 친구였어요. 자주 왕래하고 그랬는데, 경찰에 붙잡혀가 소식이 없었죠."

또 한해수의 어머니가 몇 차례 대전형무소로 면회를 간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증언이 인정되어 진실화해위원회는 2010년 한해수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했다.

그런데 법원은 한해수가 어떤 사건으로 인해 구속되었는지가 명확하지 않기에 대전산내사건 희생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한해수의 '판결문'이 있었다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해수의 딸 한금선(74세. 경남 창원시 동읍 송정리)은 아버지 관련 민사소송 때에 몸이 아파 재판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아버지 판결문을 제출해야 하는 사실조차 몰랐다.

누가 입증해야 하는가
 

김귀순 한금선 모녀 김귀순(우측) 한금선 모녀 ⓒ 박만순

 
그렇다면 한해수가 국가폭력의 희생자임을 입증해야 할 주체는 누구인가? 이 사실은 이미 진실화해위원회가 2010년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법원은 이 사실을 부정했다. 법원의 주장을 받아들이려면, 한해수가 국가폭력에 희생되지 않았음이 역으로 증명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문제를 해결했어야 할 주체는 법원이었다. 그런데 법원은 자기의 의무는 방기한 채, 유가족들의 가슴에 다시 한 번 대못을 박았다. '국가는 한해수를 죽이지 않았다. 죽였다는 사실을 당신들이 입증하라'고 주장한 꼴이다.

* 박만순의 기억전쟁 대전편 마무리 합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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