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8 20:34최종 업데이트 20.08.08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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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더블린 거리 ⓒ 연합뉴스

 
'아 목동들의 피리소리들은 산골짝마다 울려나오고
여름은 가고 꽃은 떨어지니 너도 가고 또 나도 가야지'


일제 강점기인 1935년 현제명이 펴낸 <세계애창곡집>에 실려 처음 우리나라에 알려진 '아 목동아'의 첫 구절이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많이 애창되는 민요 중 하나지만 이 곡의 출생의 비밀은 좀 복잡하다.


'런던데리의 선율'(Londonderry Air)이라는 이름으로 아일랜드인들에 의해 구전되던 이 곡은 19세기 중반 북아일랜드의 제인 로스라는 인물에 의해 채보되어 빛을 본다. 저작권 없는 작자미상 민요다 보니 이 사람 저 사람이 가사를 붙여 세상에 알리게 되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버전이 바로 '대니보이'(Danny Boy). 영국인 변호사 겸 작곡가 프레데릭 에드워드 웨덜리(Frederic Edward Weatherly)가 1910년 아들을 전쟁터로 내보내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써놓은 시에 이 곡을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런던데리의 선율 혹은 대니보이

'대니보이'는 그 후 영국인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으나, 무엇보다 암울한 조국을 떠나 신대륙으로 이주한 아일랜드인들에게는 향수를 달래주는 음악으로 그만한 것이 없었다. 아일랜드 출신을 자처하면서 이 노래를 모른다면 가짜 취급을 받기까지 했다고 한다. 아일랜드 출신 미국인들에게 '대니보이'는 조국 아일랜드 자체였다. 과거 20세기 초 미국의 시골마을 아이리시펍에 앉아 맥주를 기울이며 '대니보이'를 흥얼거리는 미국인이 있다면 그는 필시 고향을 그리워하는 아일랜드 출신 노동자였을 것이다.

북아일랜드에서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국제경기를 치르기 전 북아일랜드 선수들은 자신들의 국가로 '대니보이'를 부른다. 물론 영국의 일부분인 북아일랜드의 공식 국가는 영국 국가인 '갓 세이브 더 퀸'(신이여 국왕을 지켜주소서, God save the Queen)이다. 하지만 이들이 웨일스, 스코틀랜드 등과 함께 개별적으로 국제경기에 나설 때는 '대니보이'가 '갓 세이브 더 퀸'을 대신한다. 북아일랜드에 거주하는 연합주의자(친 영국 성향)들은 '대니보이'를 국가로 부르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반대로 이곳의 민족주의자(친 아일랜드 성향)들은 '갓 세이브 더 퀸'을 자신들의 국가로 생각하기를 거부한다.

그렇다면 아일랜드인들은 '대니보이'를 어떻게 생각할까? 북아일랜드는 정치적으로 영국의 일부지만 아일랜드는 엄연한 별개의 공화국이다. 북아일랜드인들의 국가수반은 영국여왕이지만 아일랜드인들에게 국가수반은 아일랜드 대통령이다. 이들에게 '대니보이'는 그저 구전 민요일 뿐 최고 애창곡도, 국가도 아니다.

우선 아일랜드인들에게 이 곡의 제목은 '대니보이'가 아니라 '런던데리의 선율'이다. '대니보이'는 그들의 민요 '런던데리의 선율'에 영국인들이 가사를 붙인 노래일 뿐이다. 따라서 '런던데리의 선율'을 흥얼거릴지언정 '대니보이'를 부르거나 심지어 그들의 국가로 여기지는 않는다. 혹시 아일랜드 여행을 간다면 펍에서 만난 아일랜드인에게 '대니보이'를 안다고 말 걸지 말자.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간다면 술집에서 만난 한 외국인이 아리랑을 일본식 제목으로 부르며 아는 척하는 것을 상상해보라. 그 아일랜드인은 바로 그 기분일 것이다.
 

아일랜드 지도 ⓒ 위키커먼스

 
북아일랜드의 비극

지난 3일 한국엔 그리 익숙하지 않은 한 인물의 타계 소식이 전해졌다. 그의 이름은 존 흄(John Hume). 공식 국적은 영국이지만 북아일랜드인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1937년 그가 태어난 곳이 바로 런던데리(Londonderry)다. 혹자는 이곳을 '북아일랜드의 광주'라고 부른다. 존 흄은 그곳에서 태어나 북아일랜드 평화를 위한 정치 인생을 살다 그곳에서 사망했다. 북아일랜드인들의 한과 아픔, 환희, 그리고 남은 희망을 안은 채.
 
"만약 우리가 감사해야 할 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전 사민노동당 리더 존 흄이다."

미국 뉴욕에 위치한 아일랜드 전문 언론 <아이리시 센트럴>은 지난 3일 그의 사망 소식과 함께 이렇게 표현했다.

아일랜드섬과 브리튼섬은 본디 켈트족의 생활무대였다. 그러다 1세기 로마의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브리튼섬의 남쪽 3분의 2가 로마화되고, 5세기엔 대륙의 북쪽에서 앵글로색슨족이 브리튼섬으로 들어오기 시작해 점차 브리튼섬 전역으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아갔다. 브리튼섬에 왕국을 건설한 앵글로색슨족이 이웃 섬 아일랜드를 탐하기 시작한 건 12세기말. 그때부터 시작된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는 20세기까지 무려 800년 가까이 지속됐다.

아일랜드인들의 저항이 있을 때마다 영국정부의 진압은 가혹했고, 16세기부터는 아일랜드섬 북쪽 얼스터 지방으로 신교도들을 대거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마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서안지역에 자국민들을 대거 이주시키듯이. 아일랜드 구교도들과 이주민 신교도들의 갈등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영국정부의 무력을 등에 업은 이주 신교도들은 점차 재력을 확대하고 인구도 늘어 얼스터 지방의 다수세력이 되었다. 20세기 초 치열한 독립전쟁 끝에 아일랜드는 독립을 쟁취했지만 얼스터 지방의 다수를 차지하는 이주민들은 독립 아일랜드를 거부하고 영국으로 남기를 희망하면서 해방 아일랜드 정부는 이곳 북아일랜드 문제로 또 다시 내홍을 겪게 된다.

수백 년의 피지배 역사를 종식시키고 독립을 이루려는 아일랜드가 이제 독립을 거부하는 북아일랜드 문제로 새로운 비극의 시대를 맞게 된 것. 북아일랜드에 남아 있는 소수 구교도들은 독립 아일랜드에 합류하기를 원했지만 다수의 신교도들은 독립을 거부하고 영국 시민으로 남고자 했다. 이렇게 북아일랜드는 아일랜드와 영국의 대립이라는 오랜 비극의 산물 위에서 또다시 구교도와 신교도간의 대립의 땅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아일랜드 독립에 함께 하고자 하는 구교도들은 원래부터 그 땅에 뿌리 내리고 살던 토착민의 후예들이다. 이들이 민족주의자, 독립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는 자연스럽게 진보성향을 보인다. 반대로 독립을 거부하는 신교도들은 앞서 언급했듯 영국정부가 아일랜드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16세기부터 이주시킨 브리튼섬 출신의 후예들이다. 따라서 이들이 영국에 소속되고 싶은 연합주의자, 반독립주의자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정치적으로는 보수 성향을 띤다.

영국 권력층의 지배욕 때문에 벌어진 아일랜드 그리고 북아일랜드의 비극은 이처럼 누구도 해결할 수 없을 수렁으로 빠져들게 됐다. 영국에 대한 아일랜드의 독립투쟁은 물론이고 북아일랜드 내부의 구교도와 신교도 사이의 반목과 물리적 충돌은 20세기 말까지도 아일랜드 섬을 전쟁과 갈등으로 점철되게 했다.

1968년 10월 5일, 그리고 1972년 1월 30일 런던데리에서 구교도인들의 시위가 열렸는데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폭력사태가 빚어졌다. 특히 1972년 시위 당시에는 비무장의 시민들을 향해 영국 공수부대 대원들이 발포를 해 14명이 죽고 13명이 부상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80년 광주의 비극보다 불과 8년 전의 일이다.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이 사건으로 북아일랜드는 되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신구교도 양측간의 본격적인 가해와 보복이 이어졌고, 그 후 30여 년간 총 360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아일랜드 평화협정 설계자 존 흄 SDLP 전 대표 ⓒ 연합뉴스

 
평화와 통일은 한 번에 오지 않았다

북아일랜드 사민노동당 당수 존 흄이 중재자를 자처하고 나선 것은 이런 극도의 분열 상황에서였다. 그의 중재의 핵심은 '우리부터 바꾸는 것'이었다. 가톨릭 신자로서 독립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는 흄은 자신의 지지자들을 향해 폭탄과 총기를 버려야 평화가 가능하다고 꾸준히 설득했다. 유일한 대타협의 방법은 대화를 통하는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자신의 정당 사민노동당과 그 지지자들은 물론이고 더 강경한 독립주의 정당 신페인(Sinn Fein, 오로지 우리 스스로)을 향해서도 같은 메시지였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설득하려면 지속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말로 전달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평화 중재에는 극도의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특히 외세에 의해 같은 땅에 살던 사람들끼리 분열되어 스스로를 향한 증오만이 남는 경우에는 더 시간이 필요하다. 북아일랜드를 포함한 아일랜드의 비극은 외세의 폭력적 개입과 억압, 착취, 분열 획책이 수세기 이어져, 그 결과 자신들 내부에서 사분오열이 되어 버렸다는 데에 있다. 외세를 마침내 몰아냈으나 내부의 골은 파일 대로 파이고 통일을 목전에 두고 결국 분열해버린 것.

수없이 많은 시도와 좌절, 재시도 끝에 1998년 4월 10일 다자회담을 통한 북아일랜드 평화협정 '굿프라이데이 협정(Good Friday Agreement)'이 타결됐고 그해 존 흄은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수반이자 연합주의자 지도자 데이비드 트림블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그리고 북아일랜드의 평화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일랜드 공화국의 헌법은 북아일랜드가 수복해야 할 자신들의 영토임을 명시하고 있다. 이들에게 북아일랜드는 언젠가 되찾아야 하는 땅이고 그 날이 진정한 통일이고 진정한 독립이다. 북아일랜드인들에게는 통일보다 시급한 것이 평화였다. 그렇게 아일랜드인들은 독립과 통일보다 평화를 먼저 선택했다.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주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오랜 아픈 경험으로 깨달았다. 희망과 현실 정치가 반드시 일치하지만은 않는다는 것과 함께.

제일 먼저 자신을 비우는 것, 지나친 순결주의는 피하는 것, 불완전성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취할 수 있는 평화를 만드는 유일한 길이고 그것이 언젠가는 통일로 향한다고 이들은 믿고 있다. 존 흄은 그들에게 그 믿음을 주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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