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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7.07 13:08 수정 2020.07.08 09:08
와인 애호가들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돌고 돌아 도착하는 최종 목적지, 바로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의 피노 누아(포도 품종)다. 영롱한 루비색에 얇은 투명 커튼처럼 섬세하면서도 육감적이고 세련된 이 액체를 접하면 와인 분류 기준이 달라진다. 부르고뉴 피노 누아와 기타 와인으로.

와인 초보라도 단박에 구분할 수 있을 만큼 맛과 향에서 자신만의 개성을 한껏 드러내니 그 존재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미국이나 뉴질랜드의 피노 누아도 나름 인정받고 있으나 여전히 부르고뉴 피노 누아에 견주기에는 기량 차이가 크다.
 
와인의 끝판왕으로 평가받는 피노 누아. 빛깔과 풍미의 섬세함만큼이나 껍질도 얇고 토양 및 기후에 예민해 키우기가 이만저만 손이 가는 게 아니다. 그래서? 비싸다. 그것도 많이 비싸다(그 유명한 로마네 꽁띠도 부르고뉴 피노 누아다).

부르고뉴에 맛들이면 패가망신한다는 얘기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결국 와인 애호가는 부르고뉴로 발길을 향하게 되어 있다. 다만 부르고뉴로 나아가는 길은 다소 험난하니 나침반이 되어 줄 사전 지식들이 필요하다. 그중 하나인 부르고뉴 와인 등급에 대해 얘기해보겠다.
 

ⓒ 고정미

 
2015년 11월의 일이다. 전달에 마신 부르고뉴 와인 알베르 비쇼 뉘 생 죠르주 프리미에 크뤼 샤또 그리 모노폴(Albert Bichot Nuits-Saint-Georges Premier Cru Château Gris Monopole) 2010 빈티지가 너무 인상적이었던 시기다. 마침 모 백화점 와인 매장의 할인장터에서 부르고뉴 와인을 추천받고 있었다.
 
매니저 "조셉 드루앙 쥬브레 샹베르땡(Joseph Drouhin Gevrey-Chambertin) 2010 빈티지 추천드립니다."
임승수 "알베르 비쇼 뉘 생 죠르주 프리미에 크뤼 샤또..... 아이고, 이름이 어려워서 사진으로 보여드릴게요. 이게 정말 맛있었는데요. 이거랑 비교해서 어떤가요?"
매니저 "상대가 안 되죠. 쥬브레 샹베르땡이 뉘 생 죠르주보다 더 좋아요."
임승수 "아. 그런가요? 추천해주시는 와인이 더 싼데, 그래도 더 좋은 건가요?"
매니저 "네에. 믿고 드셔보세요."
 
지금 생각하면 매니저나 나나 이불킥할 대화다. 이 대화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알아야 부르고뉴 와인을 잘 고를 수 있다. 지금부터 샹폴리옹이 로제타석을 분석하듯 암호문 같은 대화를 분석해보자.
 
부르고뉴 와인은 품질에 따라 등급이 나뉘는데 낮은 등급부터 지역 단위→마을 단위→프리미에 크뤼→그랑 크뤼 순이다. 각 등급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지역 단위(Regional appellation)

아래의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듯, 지역 단위 와인은 와인 라벨에 'Bourgogne(부르고뉴)'라고 크게 써 있다. 윗 등급 와인을 만들고 남은 평범한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부르고뉴 와인의 절반이 조금 넘는 정도가 지역 단위 등급으로 분류된다. 더 자세히 들어가면 살짝 복잡한데, 사실 이 정도만 알고 있어도 큰 문제는 없다. 부르고뉴 와인 중 그나마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부르고뉴 지역단위 와인 지역 단위 와인은 와인 라벨에 Bourgogne(부르고뉴)라고 크게 쓰여있다. ⓒ 임승수

   
마을 단위(Village appellation)

부르고뉴에는 40여 개에 이르는 마을이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코트 드 뉘(Côte de Nuits) 지역의 마을들이 유명한데, 본 로마네(Vosne-Romanée), 뉘 생 죠르주(Nuits-Saint-Georges), 쥬브레 샹베르땡(Gevrey-Chambertin), 샹볼 뮈지니(Chambolle-Musigny), 부조(Vougeot), 모레 생 드니(Morey-Saint-Denis) 등이 와인 애호가에게 친숙한 마을이다.

부르고뉴 와인 중 대략 35% 내외가 이 등급에 속한다고 한다. 마을 단위 와인의 라벨에는 마을 이름만 크게 적혀 있다. 예컨대 라벨에 크게 'Gevrey-Chambertin'이라고만 적혀 있으면 쥬브레 샹베르땡 마을에서 재배한 포도로 만든 와인이라는 의미다. 물론 윗등급인 크리미에 크뤼와 그랑 크뤼 포도밭의 비싼 포도는 쏙 빼놓고 만들었다. 지역 단위 와인보다 비싸지만 그래도 비벼볼 만하다. 아무래도 애호가들은 이 등급의 와인을 주로 마시게 된다.
 

부르고뉴 마을단위 와인 마을 단위 와인의 라벨에는 마을 이름만 크게 적혀 있다. ⓒ 임승수

   
프리미에 크뤼(Premier Cru)

마을의 포도밭 중에서 품질이 뛰어난 밭을 따로 프리미에 크뤼 등급으로 지정한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프리미에 크뤼 와인의 라벨에는 마을 이름과 더불어 포도밭의 이름도 함께 들어가며, 프리미에 크뤼 등급 와인임을 의미하는 'Premier Cru(혹은 1er Cru)'가 붙는다. 부르고뉴 와인 중 대략 10% 정도를 차지한다. 이 등급부터 가격이 급속히 상승한다. 명성 높은 몇몇 프리미에 크뤼 와인은 심지어 웬만한 그랑 크뤼보다 훨씬 비싸기도 하다.
 

부르고뉴 프리미에 크뤼 와인 라벨에는 마을 이름과 더불어 포도밭의 이름도 함께 들어가며, 프리미에 크뤼 등급 와인임을 의미하는 Premier Cru(혹은 1er Cru)가 붙는다. ⓒ 임승수

 
그랑 크뤼(Grand Cru)

마을의 포도밭 중에서 프리미에 크뤼를 뛰어넘는 최고 수준의 밭을 그랑 크뤼 등급으로 지정한다. 그랑 크뤼 와인의 라벨에는 마을 이름이 없고 포도밭의 이름만 들어가며, 그랑 크뤼 등급 와인임을 의미하는 'Grand Cru'가 붙는다.

부르고뉴 와인의 약 1~2% 정도 차지한다. 이 등급에서는 가격이 구름 위로 올라간다. 그중에서도 특히 높은 평가를 받는 몇몇 그랑 크뤼 와인은 웬만한 소형차 한 대 가격이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더라도 구입에 큰 결심과 명분(생일, 기념일 등)이 필요하다.
 

부르고뉴 그랑 크뤼 와인 라벨에는 마을 이름이 없고 포도밭의 이름만 들어가며, 그랑 크뤼 등급 와인임을 의미하는 Grand Cru가 붙는다. ⓒ 임승수

 
자! 이제 다시 문제의 그 대화 장면으로 돌아가 암호문을 해석하자. 우선 매니저의 '쥬브레 샹베르땡이 뉘 생 죠르주보다 더 좋아요'라는 말 자체는 큰 문제가 없다. 앞서 설명했듯이 쥬브레 샹베르땡과 뉘 생 죠르주는 부르고뉴 마을 이름이다. 쥬브레 샹베르땡 마을은 9개에 이르는 그랑 크뤼 포도밭이 있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뉘 생 죠르주 마을에는 그랑 크뤼 밭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대체로 평가가 낮다. 와인 가격도 다른 마을에 비해 저렴한 편이다. 쥬브레 샹베르땡이 뉘 생 죠르주보다 더 좋다는 얘기는 그런 사실을 토대로 나온 말이다. 다만, 그 매니저의 말은 어디까지나 지역 대 지역, 마을 대 마을, 프리미에 크뤼 대 프리미에 크뤼 식으로 같은 등급끼리 비교했을 때여야 의미가 있다.

 

ⓒ 고정미

 
내가 매니저에게 사진으로 보여준 와인은 뉘 생 죠르주 마을의 프리미에 크뤼 등급 와인이다. 아래의 사진에도 나오듯이 라벨에 마을 이름인 뉘 생 조르쥬(Nuits-Saint-Georges)와 더불어 밭 이름인 샤또 그리(Château Gris)가 명시되어 있으며, 프리미에 크뤼(1er Cru)라는 표식도 있다. 반면 조셉 드루앙 쥬브레 샹베르땡은 마을 등급 와인이다. 라벨에 마을 이름(Gevrey-Chambertin)만 크게 적혀 있다.
 

두 와인 라벨 비교 (좌) 알베르 비쇼 뉘 생 죠르주 프리미에 크뤼 샤또 그리 모노폴 (우) 조셉 드루앙 쥬브레 샹베르땡 ⓒ 임승수

 
뉘 생 죠르주 마을이 쥬브레 샹베르땡 마을보다 떨어진다손 치더라도 뉘 생 죠르주 프리미에 크뤼 등급 와인이 쥬브레 샹베르땡 마을 단위 와인에도 못 미칠 수준은 아니다. 당시 알베르 비쇼 뉘 생 죠르주 프리미에 크뤼 샤또 그리 모노폴 2010의 가격은 조셉 드루앙 쥬브레 샹베르땡 2010의 가격보다 더 높기도 했고, 실제로 구입해서 마신 결과 알베르 비쇼 프리미에 크뤼 와인 쪽이 훨씬 인상적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그 매니저가 부르고뉴 와인 등급에 대해 잘 몰랐거나, 알고 있지만 와인 판매를 위해 그렇게 얘기했을 경우다. 솔직히 말해 쥬브레 샹베르땡과 뉘 생 죠르주의 격차를 아는 사람이 과연 부르고뉴 와인 등급을 몰랐을까? 해당 와인을 판매하기 위해 어수룩한 초짜에게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비싼 가격으로 구입해 바가지를 쓴 것은 아니지만, 부르고뉴 와인 등급을 알게 된 이후 그 와인 매장에는 가지 않게 되었다.
 
부르고뉴 와인을 영접한다면 지역 단위 혹은 마을 단위부터 시작해서 경험을 쌓으며 차근차근 윗등급으로 올라가는 게 무난할 것이다. 시음 데이터가 어느 정도 쌓여야 프리미에 크뤼나 그랑 크뤼 등급 와인의 진가를 더욱 또렷하게 이해할 수 있을 테니. 다만 그렇게 미적거리기에는 성격도 급하고 호기심을 못 이기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나…처럼. 그러니 정 못 참겠으면 순식간에 그랑 크뤼로 진입해도 괜찮다. 어차피 인생도 맨땅에 헤딩하며 나름 굴곡지게 잘 살아오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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