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28 16:26최종 업데이트 20.06.28 16:26
  • 본문듣기
벌써 덥다. 이럴 때 웃통 까고 찬물로 등목하면 처음 0.5초만 후회스럽고 그 뒤로는 그렇게 개운할 수 없다. 날씨가 더우면 혀도 덥다. 지금 당신의 혀에 의식을 집중해 보라. 뜨끈하지 않은가. 동네 개들도 더운지 연신 혀를 내밀고 헥헥 거린다. 이럴 땐 혀도 등목이 필요하다. 다만 피부조직과는 달리 혀는 맛을 느끼는 세포가 인도 뭄바이 인구밀도 수준으로 분포되어 있으니, 차가운 물만으로는 밋밋하다.

여름에 혓바닥 등목 용도로 가장 호사스러운 액체는 역시 시원하게 칠링한 화이트, 로제, 스파클링 와인이다. 한 번 상상해보라. 내 혀가 섭씨 10도 내외의 시원한 와인 바다에 몸을 담그고 피서를 즐기는 장면을. 생각만으로도 설온(舌溫)이 1도 하락한다. 어차피 코로나 때문에 제대로 된 피서 여행도 글렀으니, 이럴 때 신체의 일부라도 근사하게 피서를 떠날 수 있다면 그나마 위로가 되지 않을까.


혓바닥 피서용으로 그만인 3만 원대 가성비 와인을 다섯 개 골라보았다. 모두 직접 내 혓바닥으로 등목을 실행한 후 깊은 고민과 사색을 통해 엄선한 액체들이다.

클라우디 베이 소비뇽 블랑
Cloudy Bay Sauvignon Blanc


 

클라우디 베이 소비뇽 블랑 (Cloudy Bay Sauvignon Blanc) ⓒ 고정미

 

클라우디 베이 소비뇽 블랑 와인 애호가에게 워낙 유명한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 품종의 와인이다. ⓒ 임승수


   
와인 애호가에게 워낙 유명한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 품종의 와인이다. 루이비통으로 유명한 LVMH 그룹이 파는 가장 싼 명품이 클라우디 베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던데, 와인 매장에서 할인가 3만 원대에 종종 목격되니 그렇게 불릴 만도 하다(LVMH 그룹은 2003년에 클라우디 베이를 인수했다).

이 와인의 풍미가 주는 이미지는 열대과일 특유의 새콤함에 이슬 맺힌 풀잎의 상큼한 초록빛이 어우러진 느낌이다. 굳이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싱그럽다'가 적절하겠다.

지인과의 식사에서 처음 얻어먹었는데 느낌이 참 좋았다. 하지만 남이 사 주는 술은 언제나 맛있는 법 아닌가. 속단할 수 없어 추후 내 돈 내고 사서 재차 검증했는데, 역시 애호가들이 호평할 만한 기량을 보여주었다.

기본적으로 해산물과의 궁합이 훌륭하다. 특유의 싱그러움이 해산물의 비릿함을 말끔하게 씻어준다. 아삭한 샐러드, 향긋한 나물과도 잘 어울린다. 그 외에 여러 음식과 두루 어울리지만, 누가 한 병 주면서 지금 마시라고 권한다면 나는 생선회와 곁들이겠다. 뒷맛이 아주 살짝 단데, 단 술을 꺼리더라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수준이다.

무똥 까데 아이스 로제
Mouton Cadet Ice Rosé


 

무똥 까데 아이스 로제 (Mouton Cadet Ice Rose) ⓒ 고정미

 

무똥 까데 아이스 로제 파스타나 리조또를 세상 맛있게 먹고 싶다면 이 로제 와인을 구해서 곁들이길 권한다. ⓒ 임승수


   
분홍빛 감도는 프랑스의 로제 와인이다. 단골 가게인 이마트 영등포점 와인 매장 직원에게 추천받아 3만 원 중반의 가격에 구입했다. 확실히 로제는 그 특유의 연분홍 빛깔처럼 어정쩡한 이미지가 있다.

화이트도 아니고 그렇다고 레드도 아닌 것이, 서양에서는 피크닉 와인으로 사랑받는다는데 한국의 피크닉에는 이미 소주나 맥주가 대세인지라 애매한 포지션이다. 어떻게 마셔야 본전을 뽑을까 고민하다 불현듯 파스타나 리조또 등과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 배달 음식으로 주문해 곁들여 마셨다. 이럴수가. 궁합이 예상을 뛰어넘는 초대박이었다.

와인 자체의 풍미는 모난 데 없이 둥글둥글하면서도 다소 심심한 듯했지만, 이게 파스타와 리조또를 만나니 마치 요철이 딱 들어맞는 직소 퍼즐처럼 완전체가 되었다. 당시 느꼈던 시너지 효과가 너무 인상적이라 나중에 다른 로제 와인을 구입해 똑같은 음식과 곁들여 봤다. 안타깝게도 무똥 까데 아이스 로제와의 궁합에는 훨씬 못 미치더라.

같은 로제 와인의 범주로 분류되더라도 와인마다 사용하는 포도 품종과 제조방식이 다르니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만약 당신이 파스타나 리조또를 세상 맛있게 먹고 싶다면 빤한 콜라와 사이다는 잠시 잊고 이 로제 와인을 구해서 곁들이길 권한다. 흔해 빠진 음식과 어정쩡한 와인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조화에 감탄할 것이다.

도멘 슐룸베르거 게뷔르츠트라미너 그랑 크뤼 케슬러
Domaine Schlumberger Gewurztraminer Grand Cru Kessler

 

도멘 슐룸베르거 게뷔르츠트라미너 그랑 크뤼 케슬러 (Domaine Schlumberger Gewurztraminer Grand Cru Kessler) ⓒ 고정미

 

도멘 슐룸베르거 게뷔르츠트라미너 그랑 크뤼 케슬러 게뷔르츠트라미너, 포도 품종 이름이란다. 외우느라 사흘 걸렸다. 프랑스 알자스 지역 와인이다. ⓒ 임승수


   
게뷔르츠트라미너, 포도 품종 이름이란다. 외우느라 사흘 걸렸다. 프랑스 알자스 지역 와인인데 좀 색다른 와인에 도전하고 싶어서 무턱대고 구입했다. 가격은 3만 원대 중반. 다소 단맛이 나는 와인이라 일부러 매콤한 국물의 샤브샤브와 매칭시켰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내 취향과는 안 맞았다.

그런데 왜 추천하느냐고? 다른 누군가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할 와인이기 때문이다. 우선 향기가 상당히 독특했다. 우리 가족이 돌아가면서 향기를 맡았는데, 나는 강렬한 배 향기를 느꼈고, 아내와 아이들은 그걸 젤리 과자 향기라고 표현하더라.

다른 와인에서 느껴보지 못한 독특한 향이었는데 그 느낌이 꽤 인상에 남았다. 맛에 있어서는 나와 아내가 단맛을 선호하지 않아서 그렇지, 단맛 술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마시자마자 바로 재구매를 고려할 만큼 매력이 넘친다.

하루는 내가 페이스북에 이 와인을 소개하니 어떤 분이 '가격이 만만치 않지만 작가님을 믿고 한 번 마셔보겠습니다'라고 댓글을 남겼다. 몇 시간이 지나 그분이 같은 게시물에 '좋네요. 아주 고급진 단맛이...'라고 추가로 댓글을 남기더라.

이렇게 향도 개성 있고 단맛도 도드라지는 와인은 곁들일 음식을 주의깊게 선택할 필요가 있다. 와인 제조사 도멘 슐룸베르거 홈페이지를 보면 매운 소스의 아시아 음식과 잘 어울린다고 나온다. 그러니 간이 강한 중식, 베트남식, 한식 등과 곁들여도 좋을 듯싶다.

몬테스 알파 스페셜 퀴베 샤도네이
Montes Alpha Special Cuvée Chardonnay

 

몬테스 알파 스페셜 퀴베 샤도네이 (Montes Alpha Special Cuvee Chardonnay) ⓒ 고정미

 

몬테스 알파 스페셜 퀴베 샤도네이 국민 와인 몬테스 알파의 윗 등급인 스페셜 퀴베 시리즈의 샤도네이 버전이다. ⓒ 임승수


   
국민 와인 몬테스 알파의 윗 등급인 스페셜 퀴베 시리즈의 샤도네이 버전이다. 스페셜 퀴베 시리즈는 흰색 라벨인 몬테스 알파와 달리 검은색을 채용해 블랙 라벨이라 부르기도 한다.

몬테스 사의 와인은 주로 레드 와인을 마셔서 샤도네이는 경험이 없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큰 기대 없이 마셨다가 깜짝 놀랐다. 베스트셀러인 카베르네 소비뇽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몬테스 알파 시리즈의 장점은 호불호 갈리지 않고 누구나 좋아할 만한 무난하고 둥글둥글한 풍미에 있다. 모임을 하다 보면 꼭 그런 사람 있지 않은가. 큰 존재감을 드러내지는 않으나 적당한 매력으로 유쾌하게 분위기를 이끌며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사람 말이다.

샤도네이 품종에서도 그런 장점을 잘 구현했다. 몬테스가 와인 잘 만든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한 와인이다. 네이버의 한 와인 카페에 이 와인의 장터 할인가를 문의한 적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댓글이 달렸다.

"싸게 사시면 3만 원 초반, 평균 3만5천 원 정도면 어렵지 않게 구하실 수 있어요. 몬테스 알파 별로 안 좋아하는데, 저도 저건 맛있게 몇 병 마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마실 때 어떤 음식을 곁들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음식보다도 와인 자체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강렬하지는 않지만 은근히 매력 있는 그 풍미가 여전히 뇌리에 생생하다. 두루두루 좋아할 잘 만든 샤도네이.

뵈브 엘리자베스 브뤼
Veuve Elisabeth Brut
 

뵈브 엘리자베스 브뤼 (Veuve Elisabeth Brut) ⓒ 고정미



 

뵈브 엘리자베스 브뤼 샴페인이 3만원 밑이라니! 그냥 그걸로 끝이다. 망설임 없이 집어 들었다. ⓒ 임승수


   
냉수 등목에 기포 마사지까지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자쿠지가 바로 스파클링 와인이다. 그중에서도 프랑스 샹파뉴 지역의 스파클링 와인인 샴페인은 특히 고급 자쿠지라 하겠다. 다만 고급이다 보니 대체로 가격이 사악하다. 뵈브 엘리자베스 브뤼 같은 녀석만 빼고 말이다.

얼마 전 집에서 가까운 이마트 트레이더스에서 3만 원도 안 되는 가격표를 달고 떡하니 누워있더라. 샴페인이 3만원 밑이라니! 그냥 그걸로 끝이다. 망설임 없이 집어 들었다. 혹시나 노파심에 부연하자면, 그 유명한 뵈브 클리코(Veuve Clicquot) 샴페인과 헷갈리지 말기 바란다. 전혀 상관없는 와인이다.

그러면 맛도 상관없느냐고? 뵈브 클리코의 보급형 샹페인보다 절반도 안 되는 가격이지만, 맛은 대략 68.3%에 육박한다. 게다가 샴페인만큼 여러 음식과 두루두루 어울리는 와인도 찾기 힘들다. 보이면 그냥 산다. 심지어 새우깡이랑 먹어도 맛있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