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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6.09 08:42 수정 2020.06.16 09:41

'노회찬 의원 영결식' 국회장으로 엄수 2018년 7월 27일 오전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고 노회찬 국회의원 영결식'에서 장의위원장을 맡은 문희상 국회의장이 영결사를 마친 뒤 영정사진 앞에 놓고 있는 모습. ⓒ 유성호

 
기록 연재를 시작하며

2018년 7월 23일 그날 이후 노회찬의 삶과 꿈, 노회찬의 철학과 정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2020년 4월, 21대 총선을 앞두고서는 방송언론 등에서 '노회찬'이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했다. 특히 그의 오랜 거처였던 정의당은 "'노회찬의 꿈'을 이어가겠다"라고 하면서 노회찬 정신으로 '6411번 버스'와 '투명인간'을 자주 불러냈다.

노회찬은 살아오면서 어떤 꿈을 갖고 있었을까?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길을 선택했고, 어떤 비전을 내걸었을까? 60여 년 삶의 행로에서 그의 꿈과 길과 비전은 늘 같은 것이었을까? '노회찬 정신'이라고 했을 때 그 핵심은 무엇일까? 그의 꿈과 길, 그 마음의 심연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노회찬의 꿈을 누가 어떻게 이어갈 수 있을까?(조현연, '노회찬의 꿈, 노회찬의 정치는 무엇인가?', 제1회 노회찬포럼 발표문, 2019.4.23.).

"우리가 가는 길이 바로 역사이고 이를 기록하는 것은 나의 임무"(<힘내라 진달래>, 사회평론, 2004, 7쪽)라고 한 그의 말을 기억하면서, 노회찬이 남긴 말과 글과 사진 등 기록을 모으고 재구성해서 연재를 시작하려 한다.

이 기록 연재는 2019년 1회 노회찬포럼 발표문의 문제의식을 더 가다듬고 내용을 더 두텁고 풍부하게 채우는 차원에서 준비됐다. 어떻게 시작할까 고민하던 중에 문득 두 개의 장면이 머리에 떠올랐다. 오래 전에 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꿈>과 신영복의 <처음처럼>의 글귀였다. 

첫 번째 장면: <꿈> 속의 '물레방아 도는 마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꿈'(1990) 중 한 장면. ⓒ 구로사와 아키라

 
구로사와 아키라는 세계 영화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감독 중 한 명으로, 노회찬은 그의 영화를 거의 다볼 정도로 그를 굉장히 좋아했다. 그의 작품 <7인의 사무라이>는 전 세계 영화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런 그가 1990년 여든 살의 나이로 8개의 옴니버스 단편들을 모아 영화 한 편을 만든다. 자신이 꾼 꿈들을 소품처럼 하나하나 몽상적으로 나열한 영화 <꿈>(夢)이 그것이다.

"이런 꿈을 꾸었다"로 시작되는 마지막 꿈 '물레방아 도는 마을'에서 노감독은 동화 같은 마을 이야기를 다루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전하는 듯하다.

자신이 생각하는 순수한 이상향에 대해 말하는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이 여행을 하다가 예쁜 꽃들이 피어 있고 새들이 지저귀는 평화로운 마을에 도달한다. 끊임없이 도는 윤회의 상징인 물레방아가 생명의 근원인 물과 함께 등장한다. 죽음 또한 소멸이나 슬픈 이별이 아니라 자연으로 귀의하고 삶의 순환에 참여하는 축복이자 축제로 받아들인다. '잘 먹고 잘 살다 가는 것'이라는 103세 촌노의 말처럼 자기를 버리고 떠난 첫사랑의 마을 장례식은 그야말로 축제의 행렬이다. 다리를 건너 마을에 들어온 주인공은 다시 다리를 건너 사라진다.

"제가 써달라고 할지도 의문이지만 굳이 써야 한다면, '잘 놀다 간다', 이렇게 쓰고 싶다."

'생전에 묘비명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냐'는 <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의 질문을 받고 노회찬이 잠시 고민하다가 한 말이다.
 

고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서화 '처음처럼'. ⓒ 연합뉴스

 
두 번째 장면: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노회찬이 마음의 스승으로 존경한 고 신영복 선생이 <처음처럼>에 적은 글귀 중 일부다. 앞부분의 글귀는 이렇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 수많은 처음을 꾸준히 만들어가는 이 삶의 여정에는, 삶에 대한 사색과 외경, 나름 꿨던 여러 꿈들이 담겨 있을 것이다. 노회찬의 삶도 그러했을 것이다. 특히 '세상 속으로' 들어오고 난 이후에는 실망과 좌절과 희망, 기쁨과 슬픔, 분노와 희열이 뒤섞인 가운데서도 '그날'의 꿈만큼은 잃지 않고 걸어온 삶이었을 것이다.

10년 전 어느날 영화감독 변영주는 노회찬과 이런 대화를 나눈다('변영주, 노회찬에게 묻다: 바그너를 좋아하세요?', 노회찬·김어준·진중권 외, <진보의 재탄생: 노회찬과의 대화>, 꾸리에, 2010, 127쪽; 132쪽).
 

노회찬 의원과 번영주 영화감독의 대화. 책 '진보의 재탄생: 노회찬과의 대화'(2010) 중에서. ⓒ 꾸리에

 
번영주 : "대부분의 우리들은 인생의 여러 지점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선택들을 하잖아요. 현실문제와 부닥쳐서라거나, 아니면 이것이 더 옳은 길이라고 믿기도 하면서... 자신의 삶에서 지키기로 결심했던 순간들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노회찬 : "어려운... 매우... 좀 깊게 생각해야 되는 대목들인데, 정답을 얘기하기보다는 느낀 대로 얘기하고 싶은데. 돌이켜보면 저 역시도 꿈과 현실 속에서 많이 왔다갔다 했던 거 같아요. 어떤 경우에는 꿈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걸어가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현실이 중요하다는 판단으로 계속 가기도 했던."


"꿈과 현실 속에서 많이 왔다 갔다"하면서 "수많은 처음을 꾸준히 만들어간" 노회찬이 꿈꾼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그가 남긴 말과 글을 통해 찾아가 보자.

노회찬이 꿈꾼 세상

"노 의원이 여태껏 살아온 길을 돌아볼 때 과거에 비해 지금 변한 것은 무엇이고, 또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대해, 노회찬은 이렇게 답한다(정운영,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4, 71쪽).

"변하지 않은 것은 목표이고, 변한 것은 방법입니다. 인간해방, 노동해방의 신념은 변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실현시키는 방법은 현실에 다가설수록, 구체화될수록 변하고 있습니다. 학습을 계속하는 이유는 이 변화를 올바르게 끌어내기 위해서지요."

정치가의 길을 선택한 노회찬, 그의 꿈은 '제7공화국' '노동존중사회·선진복지국가'로 구체화된다.

"한나라당 10년, 범여권 10년의 6공화국을 해체하고, 노동자·농민·서민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제7공화국을 건설하자. 7공화국 11테제에는 노동자, 농민, 서민의 주름살을 쫙 펴는 진보적 상상으로 가득하다." (2007년 민주노동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저에겐 꿈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선진복지국가로 나아가는 꿈입니다. (선진복지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선 강한 노동이 필요합니다.) 노동이 존중될 때 선진복지국가는 그만큼 빨리 실현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노동존중사회를 만드는 데 이 몸 바치겠습니다." (2016년 3월 20대 총선 출마 당시)


노회찬의 유고집 <우리가 꿈꾸는 나라>는 '불평등을 평등으로, 불공정을 공정으로,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평화의 정착으로'를 '촛불시대의 세 가지 과제'라고 하면서 나와 우리가 꿈꾸는 세상으로 요약하고 있다(노회찬, <우리가 꿈꾸는 나라>, 창비, 2018.9., 24쪽).

"지금 우리 사회는 촛불혁명 이후의 전환기를 지나치고 있으며, 우리 앞에 당면한 과제들을 해결해야 비로소 계속해서 전진할 수 있다. 당면한 과제들이란 공정, 평등, 평화를 우리 사회에 정착시키는 것이며, 이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부터 바꿔야 한다."

그의 꿈이 도달한 곳은, "당신이 나와 같은 꿈을 꾸면 좋겠습니다"는 말로 시작되는 이런 세상이었다.

"대학 서열과 학력 차별이 없고 누구나 원하는 만큼 교육받을 수 있는 나라, 지방에서 태어나도 그곳에서 교육받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 아무 불편함이 없는 나라,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지 않는 나라, 인터넷 접속이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되는 나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시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나라." (노회찬, '(여는글) 우리들의 겨울은 따뜻했다: 다시, 꿈꾸기 위하여', 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 2010, 꾸리에); 노회찬, '서문', '노회찬의 약속', 레디앙, 2010, 참조)

동화작가 염은비는 그를 기리며 "모든 시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나라"를 원한 노회찬의 꿈을 <석남꽃 언덕에서>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그리고 있다.
 

동화작가 염은비가 그린 '석남꽃 언덕에서'. ⓒ 동화작가 염은비

 
초등학교 시절 노회찬의 '꿈' - 발명가, 생물 계통의 일, 어부

한국전쟁으로 월남한 부모님 밑에서 1녀 2남의 맏이로 태어난 노회찬(1956.8.31.)은 부산 초량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어린 시절 그는 초량동 산동네에서 친구들과 많은 추억을 만든다. 한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매우 개구쟁이였을 것 같은데 어떠했나?'는 질문에 대해 노회찬은 이렇게 답한다('自由人' 인터뷰, 2011.8.30.).

"어렸을 때 썼던 일기책을 아직도 많이 가지고 있다. 그중에 '오늘은 잠이 안 온다. 엄마한테 한 대도 안 맞았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일동 웃음). 그렇게 하루라도 엄마한테 맞지 않으면 잠이 안 오는 아이였다. 또 작은 수첩이 있었는데 학교 가면 담임선생님께 도장을 받아와야 했고, 집에 오면 엄마한테 도장을 받아야 하는 수첩이었다.

그 수첩이 무엇이었느냐면 내가 사고를 안치면 도장을 받을 수 있는 수첩이었다. 집에 수첩을 가져와 선생님 도장이 안 찍혀 있으면 엄마한테 야단을 맞는 것이고, 학교 가서 수첩에 도장이 안 찍혀 있으면 동네에서 사고를 친 것이기 때문에 선생님한테 야단을 맞았다. 그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웃음). 그래도 어린 시절에 대한 좋은 추억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때 산동네에 살며 산에서 뛰어 자란 것이 가장 큰 자산이다. 어린 시절 이러한 경험은 자연과 가족들에 대한 좋은 추억을 많이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사진 왼쪽은 1960년 부산 초량 판자촌. 오른쪽은 1960년대 부산 산복도로 일대 전경. ⓒ 부산 동구청

 
진보신당 대표 시절 또다른 인터뷰에서 그는 "눈 감고도 그린다"라며 포털에서 출력한 지도 위에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입힌다.
 

2009년, 한 블로거와 인터뷰한 노회찬. 포털 지도가 보이자 어렸을 적 기억을 떠올려 설명했다. ⓒ 블로그 거다란

  
"1번은 노회찬 대표 생가가 있던 자리입니다. 여기서 태어나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있었습니다. 나중에 이 집은 도시계획으로 도로에 들어가서 철거되었습니다. 2번은 노회찬 대표 다니던 초량초등학교이고, 3번은 노회찬 대표가 버찌를 따먹다 스님에게 들켜 혼난 (구봉산) 장군암입니다.

4번은 노회찬 대표가 다니던 중학교인데 여기가 당시 부산에선 명문 중학교였습니다. 여름엔 기차 타고 바다로 놀러갔습니다. 초량기차역에서 송정, 월례, 기장 쪽으로 갔다고 합니다. 당시엔 객차가 아닌 화차였는데 의자 없는 열차 칸에 그냥 올라타고 갔다고 합니다. 가까운 송도는 그냥 걸어갔다고 합니다. 해운대는 안 갔냐고 물으니까 서울 촌놈들 오는 덴 안 갔다고 답합니다." (블로그 '거다란' 인용, https://geodaran.com/1162 , 2009.4.14.).


3번 장군암은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갈 때면 친구들과 늘 찾았던 곳으로 초등학교 시절 어린 노회찬의 일기장에 자주 등장한다. 후일 노회찬은 "학교 가듯 장군암에서 놀았다"라고 회고하기도 한다.

"오늘 아침 7시에 일어나 동생과 함께 등산을 갔다. 오전 7시인데도 그렇게 한가하지 않았다. 나는 동생과 함께 장군암절까지 올라갔다. ... 나는 다음부터 일요일마다 등산가야지 하고 작정했다." (1969년 1월 5일 일기)

"오후에 동무와 함께 산에 갔다. 원래 오늘 아버지, 동생과 함께 낚시질 하러 가기로 했는데 텔레비전의 엉터리 일기예보(오늘 비가 온다고 했다) 때문에 날씨가 걱정되어서 가지 않았는데 비는커녕 구름도 없는 하늘이 되고 마니 아깝기만 했다.

그래서 집에 있기가 심심해서 동무와 함께 산에 올랐다. 목적지는 '장군암'으로 하고 올랐다. 나의 동무는 몸이 비대해서 그런지 조금만 올라가서도 헉헉 거리고 좀 쉬고 또 오르고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였으나 별로 재미있는 것이 없어서 그 가까이에 있는 연못에 갔다. 이 연못은 저번 '사라호' 태풍이 불 때만 해도 팔목만한 고기들이 많았고 내 몸보다 큰 물뱀도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 산을 찾는 사람이 많아서 이 연못의 바닥은 차차 높아져서 개구리, 미꾸라지밖에 살지 못했다. 그런데 작년에 와보니 그 흔하던 개구리까지 멸종되어 가고 있었다. 정말 말세로다!" (1970년 6월 21일 일기)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 트위터 바이오(Bio)에 노회찬이 쓴 말로 모교인 경기고 교훈이다. 노회찬은 이렇게 말한다.

"평화인은 나중에 좀 철들어서 깨닫게 된 개념이고 지향인데, 자유인과 문화인은 부산 시대에 형성된 것 아닌가 싶어요."
 

노회찬 의원의 트위터 소개글(왼쪽)과 경기고 교훈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 (오른쪽) ⓒ 노회찬트위터, 경기고페이스북

  
자유인과 문화인의 지향을 형성시킨 부산 초량동에서의 어린 시절, 당시 노회찬의 장래희망은 무엇이었을까?

1970, 1980년대엔 대통령과 과학자, 1990년대는 의사와 판·검사. 국민(초등)학생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었을 때 손 꼽혔던 인기 직업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이들의 장래희망이 부모의 기대와 언론의 영향을 받는다. 부산 초량국민학교(1963년 3월~1969년 2월) 생활기록부에는 '학생의 희망'란이 없다. 몇몇 인터뷰에서 노회찬은 어린 시절 꿈을 어머니께서 생일 선물로 사주신 <재미있는 발명 발견 이야기>와 <원색자연학습도감> 등 책을 통해 키운 발명가, 생물 계통의 일, 어부라고 말한다.
 

초등학생 노회찬의 꿈을 키워준 책들. ⓒ 노회찬재단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비아북, 2014)를 펴낸 뒤 문화웹진 <채널예스>의 손민규(인문MD)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정치를 안 했다면, 어떤 일을 하셨을까요?" 노회찬의 대답은 이러했다.

"하고 싶은 일이야 많았죠. 그래서 뭘 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생물을 참 좋아했어요. 생물반도 하고, 채집하고 분류하는 걸 좋아했어요. 좋아하는 책 분야 중 하나가 식물과 동물 생태를 연구해서 인간 생활 사회에 접목시키는 것인데요.

생물을 미세하게 관찰해서 그것에서 원리나 습관을 읽어내고 우리 인간 살아가는 방식과 연결하는 책을 즐겨 읽습니다. 제가 그런 일을 했을 수도 있죠. 아니라면, 부산 출신이니 좋아하는 바다에서 좋아하는 고기를 잡으며 어부가 되어서 열심히 건강하게 살 수도 있었겠죠."


2017년 4월의 한 인터뷰(이혜정, <국회의원의 서재> 정의당 노회찬 의원: 자연, 사색, 행복: 책이 선물한 것들)에는 관련된 노회찬의 추억들이 오롯이 담겨 있다.

"어린 시절 읽은 책을 청년이 될 때까지 계속 펼쳐봤을 만큼, 제게는 그 자연도감이 더없이 소중했습니다. 책을 통해 만난 자연에 깊이 매료되면서, 자연 속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꾸기도 했고요. 덕분에 야생동물의 세계를 실감 나게 그린 <시튼 동물기>와 세밀한 관찰력으로 곤충의 세계를 소개해준 <파브르 곤충기>까지 아주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특히 <파브르 곤충기>는 성인이 되고 완역본을 다시 구매했을 정도로 아주 멋진 책이었죠."
 

노회찬과 책 '원색 자연학습도감'. ⓒ 국회도서관보

 
방학 때면 식물·곤충이 좋아 한 달 내내 채집하고 표본을 만드는 작업에 몰두했다는 소년 노회찬. 곤충과 꽃, 나무 등 자연에 대한 그의 관심과 애정은 인민노련 사건으로 들어간 2년 4개월의 감옥 생활에서도 이어진다. 

"감방에 있으면 바깥에 나올 수 있는 게 한두 번이에요. 그래서 철창 사이로 보이는 곳에 해바라기를 심었어요. 꽃이 안 피니까 잡초하고 똑같았어요. 어떤 날은 누가 잡초인 줄 알고 뽑아놓고... (눈을 크게 뜨며) 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뽑은 사람보고 다시 심으라고 했어요. 그렇게 자라다 보니 이게 정상적으로 잘 안 크더라고요. 겨울이 얼마 안 남았는데 꽃이 안 피어 노심초사했는데 한 1m 정도로 자랐어요.

'빵'에서 나올 때 그 해바라기 씨를 가져와 집에다 심었어요. 그 후손들이 5년 뒤 이사할 때까지 계속 우리집에서 무럭무럭 자랐죠. 그리고 집게사슴벌레 알아요? 그게 막 날면 무섭거든요. 교도관이 '에프킬라'로 (기절하는 흉내를 내며) 기절시켜 놨더라고요. 그걸 데려다 사과즙을 먹이면서 여름 내내 살렸어요.

겨울에는 난방을 해 주느라 옷 속에 넣고 다녔고요. 애들이 청승맞다고 난리였어요. '네가 빠삐용이냐'면서. '그게'(집게사슴벌레) 나랑 6개월을 같이 살다 죽었어요. 감방에서 같이 지냈던 단병호 의원 보좌관이랑 겨울에 꽁꽁 언 땅을 파고 '장엄하게' 묻었어요." (임지은, [인물탐험]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노회찬 - 노동자들의 슈바이처, 그 사랑의 줏대, <월간중앙> 2004년 10월호)

 

1994년 여름 시골집 앞마당 해바라기 화단을 배경으로 노회찬·김지선 부부. ⓒ 노회찬재단

 
청주교도소에서 부모님과 동생에게 부친 서른다섯 '청년 노회찬'의 편지에도 그것은 잘 드러난다.

"흔히 모기의 극성이 한여름의 고통을 더해 주는 경우가 많지만 이곳에선 오히려 모기를 구경하기도 힘들 정도이다. 대신 오랜만에 대하는 매미, 나비, 잠자리, 메뚜기 등의 곤충들이 그 옛날 소년 시절의 구봉산을 생각나게 하면서 한여름의 정취를 더욱 돋구어 주고 있다.

이곳에서도 농약을 제법 사용하는 원예반 뜰에선 메뚜기 종류를 보기 힘든 반면 농약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舍棟(사동) 주변의 화단에선 몽치미(!), 베짱이, 방아깨비, 사마귀 등의 곤충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이들 곤충 중에서 요즘 우리의 신경을 종종 곤두서게 만드는 것은 매미이다. 이곳에선 유지매미는 보기 어렵고 참매미와 이 지방에서 씨룩매미라고 부르는 것(가능하면 '원색자연학습도감'을 찾아 이름을 알려다오. 참매미와 외관이 비슷하나 크기가 작고-약 3~4cm-참매미보다 연녹색이 더 가미되었음) 등이 주종이다.

 

노회찬 의원이 동생 노회건씨와 부모님께 보낸 편지. ⓒ 노회찬재단

 
특히 씨룩매미는 울음소리가 요란하여 마치 피를 토하며 우는 새소리 같은데 며칠 전엔 이들이 세 마리나 창문틈 사이로 복도로 난입하여 한여름 밤의 소음 공해를 발생시키더니 결국 에프킬러까지 동원되는 비극을 만들어내고 만 적이 있다.

방 창문의 모기망에도 하룻밤에 몇 마리씩 돌진하곤 하는데 지난번에 한 마리를 재워보낸 후론 창문을 열어주지 않고 있다. 땅 속에서 5년 이상의 애벌레 생활을 보내고 성충이 된 지 4주일만에 생명을 바쳐야 하는 매미에게 하룻밤 징역도 너무 길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1991년 8월 16일 청주교도소에서 동생 노회건에게 부친 편지)

 

'원색 자연학습도감'(삼화출판사, 1964), 46쪽의 '매미'. ⓒ 삼화출판사

 
"꽃 중에선 과꽃이 그리고 풀 중에선 딸기가 가장 늦게까지 버틴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과꽃은 첫서리가 내린 후에도 시들지 않았고 딸기는 아직 푸른 잎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저도 물론 푸른 잎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1991년 11월 13일 청주교도소에서 부모님께 부친 편지)

부산중학교 시절: "슈바이처같이 오지에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의사"

2018년 7월, 황망하게 그가 떠난 뒤 중학 동기들은 추모 편지글을 통해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7년 전, 1971년. 부산시 동구 초량동, 부산중학교 3학년 4반. 배상선, 김봉룡 그리고 노회찬... 그리고 옆반의 한헌석. 이 네 명은 매일 어울려 다녔습니다. 같이 공부하고 영화 보고 음악 듣고, 밤늦게까지 토론하고, 닥치는대로 지식을 먹어치우며 커갔습니다.

... 중학생 노회찬은 그야말로 때묻지 않은, 티없이 맑고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들의 반장이었습니다. 사물을 보는 눈이 탁월했고, 이를 표현하는 언변이 어찌나 희한하던지... 그때부터 촌철살인이란 말을 들었고, 그래서 별명이 괴물이었습니다. 노괴물~"


부산중학교 시절(1969.3.~1972.2.) 까까머리 중학생 노회찬은 3년 내내 반장을 했고, 아이들을 몰고 다니며 골목대장 노릇도 했다. '괴물' 노회찬은 슈바이처와 같이 아프리카 같은 오지에서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등 봉사하는 것을 꿈꾸기도 한다. 부산중학교 생활기록부를 보면 1, 2, 3학년 '학생의 희망'란에 의사라고 적혀 있다.
 

노회찬 의원이 어렸을 적 부산에 살 때 사용하던 학생증들. ⓒ 노회찬재단

 
"방학 때면 식물·곤충이 좋아 한 달 내내 채집하고 표본을 만드는 '작업'에 몰두했다. 시간이 날 때면 부산 앞바다를 보면서 '저 너머' 미지의 세계를 생각했다. 바다 끝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 하던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던 것처럼. 어린 눈에 자신을 희생해 남을 돕는 슈바이처가 멋있어 보여 의사가 된다고 했다. 부모님은 내심 의사 아들을 두나 싶어 기대가 컸다." (임지은, [인물탐험]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노회찬-노동자들의 슈바이처, 그 사랑의 줏대, <월간중앙> 2004년 10월호)

2005년 3월 3일 노회찬은 <오마이뉴스>와 함께 '노회찬, 네티즌을 만나다'라는 제목으로 최초의 인터넷 의정간담회를 개최한다. '소년시절, 청소년기의 꿈은 뭔가?'라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슈바이처 같은 분을 굉장히 존경했다. 희생적으로 돕는 것도 대단해 보이고 아프리카 간다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노회찬 "내 토론 맞상대는 유시민과 홍준표", <오마이뉴스>, 2005.3.3.)

2007년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329호(2007.6.25.-7.1.)는 대선 경선후보의 '50문 50답'을 싣는다. 28번 '어린 시절 꿈'에 노회찬은 "슈바이처같이 오지에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의사"로 적혀 있다. 참고로 29번 문항 '직업을 바꾼다면' 물음에는, "요리사나 작곡가. 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어서"로 답하고 있기도 하다.

기록연재 | 조현연 노회찬재단 특임이사

* [기록으로 만나는 노회찬의 꿈과 길 ①-2]로 이어집니다(바로 읽기 클릭).
 

2007년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329호(2007.6.25.-7.1.)는 대선 경선후보의 '50문 50답'. ⓒ 진보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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