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6 19:54최종 업데이트 20.05.18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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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햇살이 부드러운 토요일 오후 4시경 '오월잇다'의 조강익과 장준혁을 만나러 옛 전남도청 앞에 다다랐다.

하얀색으로 칠한 옛 도청은 분수대까지 광장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 앞으로 금남로가 곧게 뻗어있었다. 어디선가 "계엄군은 물러가라"라는 함성이 묵직하게 울리는 듯했고 전일빌딩의 헬기사격 흔적에서는 '쉬시식 퍽'하고 총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많이 울었어요. 시청 앞으로 정신없이 달려갔는데 '오마이걸'이 춤 한 번 추고 갔다고 해서 허탈했어요. '비니'가 너무 보고 싶었는데..."

선머슴같은 준혁이가 활짝 웃으며 얘기한다.

"임창정을 좋아해요. 그의 노래 '나란 놈'을 걸을 때나 지하철에서나 자주 흥얼거려요. 임창정은 같이 소주도 마시고 농담도 할 수 있는 동네 형 같아서 좋아요."

강익이가 엷은 미소를 띠며 얘기했다.

자기 소개를 부탁한다는 말에 상무고 2학년 준혁이와 미래과학고 3학년 강익이가 들려준 얘기는 여느 고등학생과 다를 바 없었다. 걸그룹에 환호하고 좋아하는 연예인에게 의지한다. 덕분에 처음 만나 어색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그런데 어떻게 '오월잇다'에서 활동하게 되었나요?" 우리는 옛 도청앞 광장을 함께 거닐며 대화를 이어갔다. "2019년 도청 앞 5.18 행진에 참가했다가 학교 선배를 만났어요. 그때 권유를 받았고 호기심에 참여하게 되었죠." 묘하게도 그들의 가입 경위는 비슷했다. 그들이 활동하고 있는 오월잇다는 2018년 5월18일 만들어졌다.
 

옛 전남도청 별관 앞에서 왼쪽이 상무고 장준혁 오른쪽이 광주미래과학고 조강익이다. ⓒ 민병래

 
2014년 옛 전남도청 자리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들어서면서 도청 원형이 심하게 훼손됐다. 그래서 이를 복원하자는 싸움이 박근혜 대통령 시절인 2016년 9월 천막농성으로 시작되었다. 이때 약 50여 개 기관과 단체가 뜻을 모아 대책위를 만들었고 오월 어머니들이 적극적으로 싸웠다. 2018년 6월 청와대 앞 농성 이후 정부가 이를 수용, 2022년 7월까지 완전 복원키로 약속했다.

농성이 고양될 때 '일본군 성노예피해 할머니'들을 지원하는 '평화나비' 대학생들이 농성장 지원 방문을 왔다. 이들을 본 어머니들이 "왜 오월은 저런 청년 대학생들이 없냐?"고, "우리가 이뤄 놓은게 없다"며 한탄했다.

도청복원투쟁을 계기로 '오월잇다' 결성 

마침 오월잇다 대학생모임 전 회장 박경록과 그 친구들은 당시 고등학생 신분으로 복원 서명운동을 하면서 '도청 지킴이'로 나서고 있었다. 촛불집회에서 자원봉사를 한 고등학생들까지 뜻을 같이하면서 광주지역 10개 고등학교 학생 80여 명이 모여 어머니들의 바람대로 5·18 청춘서포터스 '오월잇다'가 출범한 것이다.

옛 도청의 별관 쪽으로 걸어가니 마침 무릎 꿇려진 전두환 동상 앞에서 젊은 남녀들이 그의 죄상을 주의깊게 읽어보고 있었다. 그를 가둔 창살에는 뿅망치 몇 개도 달려있었다.

"어떤 활동들을 하고 있나요. 어떤 활동이 기억에 남나요?" 계속되는 질문에 강익과 준혁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대답을 했다.

"4월 27일 (사자명예훼손 재판 때문에) 전두환이 온다는 얘기를 듣고 법원으로 '오월잇다' 회원들과 함께 갔어요. 친구들과 함께 플래카드도 들고, 입장문도 준비했죠. 최소한 사과라도 할 줄 알았는데 뒷문으로 들어와서 뒷문으로 갔다고 하니 정말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법정 안에서 졸기도 했다니 더 화가 났습니다."

전두환의 죄상은 12.12 군사반란은 물론 5.18 항쟁 주요 고비마다 나타난다.

계엄군은 외곽으로 후퇴했다가 충정작전을 세워 도청으로 침공할 때 지휘체계를 전투교육병과사령부로 일원화하고 소준열 소장을 사령관으로 보낸다. 이때 전두환은 자필 메모를 보내 강경하고 신속한 작전을 명령하고 성공하면 중장 진급을 약속했다. 그리고 25일 육군회관에서 계엄군 지휘부가 모인 가운데 전두환의 주도로 충정작전이 27일 0시1분 개시로 최종 결정됐고 그날 새벽 윤상원을 비롯한 수많은 젊음이 찢겨나갔다. 그후에도 유족과 부상자에 대한 탄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런 전두환에 대해 광주의 감정은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4월 27일 그날 법원 앞은 오월 단체 회원들과 취재진, 경찰 경비 인력까지 엉켜 북새통이었다. 그 와중에 오월잇다 학생들은 의젓하게 기자회견을 열었고 이한주와 노애진이 입장문을 발표했다.

"뿌듯했겠네요?"
"네, 그렇지만 기자들이 많이 주목하지는 않더라구요. 그렇지만 보람 있었어요."  

 

4월 27일 법원앞에서 오월잇다 기자회견 모습 앞줄 맨 오른쪽이 조강익, 세번째가 장준혁이다. ⓒ '오월잇다'제공

      
기자회견 얘기를 하며서 둘은 표정이 상기되었고 목소리가 높아졌다. 앞에서는 전두환 머리를 "뿅, 뿅, 뿅" 두드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났고 "와" 하는 박수소리도 터져나왔다.

"올해 초에는 농성장에 계신 어머니들(도청 복원이 확정되었지만 농성은 계속되고 있었다)에게 세배를 갔어요. 2018년 크리스마스 때는 우리 오월잇다 회원들이 어머니들을 위해 파티를 열었고 설과 추석에는 윷놀이도 함께 했어요. 오월 어머니들은 단체복을 맞춰 주거나 간식을 내주시며 고마움을 표해주셨어요.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이었죠."

마침 5.18 40주년도 앞두고 있으니 우리는 내친 김에 망월동에 가서 참배키로 했다. 금남로에서 출발, 묘역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6시 1분 전, 막 문을 닫으려는 참이었다. 민주의 문을 지나 추념문 앞에 이르는 동안 사람은 아무도 없어 적막했고 우리가 내딛는 발자국 소리만 들렸다. 추모탑 쪽으로 오르는데 어스름 하늘에선 실비라도 내릴 양인지 손등에 빗방울이 톡 떨어졌다.

​"저는 그때의 고등학생들을 기억하면서 5.18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5.18은 민주주의를 배울 수 있는 역사인데 지금 고등학생들은 5.18을 잘 몰라요"라고 강익이가 침묵을 깨고 말문을 열었다.

강익이의 말대로 40년 전 5.18에도 10대들이 있었다.

항쟁 첫날인 5월 18일, 북동에 있는 동아일보 광주지사에는 일요일임에도 수금 차 출근한 광주공고 1학년 장준하가 있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공수부대는 그를 수없이 때리고 짓밟았다. 장준하는 끌려나가다 계단에서 실신하고 말았다. 

둘째 날인 5월 19일 계림동 광주고등학교 근처에서 조대부고 3학년 김영찬은 장갑차를 둘러싼 시민들의 저항에 놀라 M16을 쏘는 공수부대에 의해 피격을 받았다. 광주항쟁기간중 최초로 총탄 사격을 받은 사건이었다.

셋째 날인 20일 오후 동성중 3학년 박기현은 책을 사러 계림동 동문다리 부근까지 자전거로 나갔다가 공수대원에게 붙잡혀 진압봉으로 두들겨 맞았다. 박기현은 앞머리가 깨진 채 전남대병원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외에도 5.18 때 어린 학생들과 10대들이 겪은 피해는 수없이 많다.

하지만 10대들은 항쟁의 주체로 나서기도 했다. 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발포 이후 시민군이 무장을 시작하던 때, 아시아자동차공장에 근무하던 김정기(19)는 장갑차와 가스살포차량 제작라인으로 시위대를 안내했다.

이때 김태헌(19, 재수생) 이용일(18, 재봉견습공) 정원훈(17, 고등학생), 강구영(18, 고등학생)등 어린 10대들이 주축이 되어 장갑차, 지프, 군용트럭, 가스차를 확보해 시민군 대열에 합류한다.

또 27일 새벽 계엄군에 맞서서 도청을 끝까지 사수했던 고등학생과 10대들도 있었다. 

극우사이트의 궤변을 믿을 때 안타까워

"역사에 관심이 있는 애들은 5.18을 기억하지만 극우사이트 같은 데서 말하는 걸 그냥 믿는 학생도 있어요. '시민들이 먼저 총을 들었는데 군인이 총을 안 들 수가 있어?'라는 말도 할 정도예요." 강익이의 얘기에 귀기울이던 준혁이도 거들고 나섰다.

지만원이 쏟아붓는 '광수 1호' 얘기 따위들이 광주의 교실에도 스며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40년이 지난 지금 발포명령자에 대한 진상규명과 처벌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했고 '계엄군의 자위권행사'라는 궤변은 여전하다.

5.18 광주를 다룬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수사기록 등에 따르면, 5월 21일 오후 1시 애국가를 신호로 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집단발포가 이루어졌다. 또 주변 수협건물, 전일빌딩, 관광호텔 등 높은 빌딩에는 공수대원들이 3~4명씩 올라가서 시위대 선두에 대한 조준사격을 했다.

전투경찰로 시위진압에 참여했던 곽형렬은 장갑차에서 기관총 캘리버50이 발사되는 것을 똑똑히 봤다고 증언한 바 있다. 모두 발포명령이 있어야 가능한 행위다. 당시 특전사령관 정호영은 1989년 월간지 인터뷰에서 "(21일 오후 1시 직전) 현장지휘관들로부터 발포명령을 묻는 무전이 무수히 올라왔다"고 스스로 밝혔을 정도다. 그런데도 광주시민이 먼저 총을 들었다는 것은 준혁이 얘기처럼 말도 안 된다.

준혁이는 또 "그때 계엄군이 외곽으로 빠졌을 때 광주는 평화로웠다, 약탈도 없었고 범죄도 늘지 않았다"는 얘기를 친구들에게 꼭 해주고 싶어했다.

당시 광주시내은행에는 1500억 원의 예치금이 있었는데 어떠한 약탈도 없었다. 또 광주시내 325개 기업들이 회사 내에 보유하고 있던 자금도, 도청회계과 금고에 직원들의 급여를 위해 찾아둔 현금도 별 문제가 없었다. 항쟁기간 중 범죄발생률이 평상시보다 낮았고 담배 한 보루, 라면 한 박스 이상을 살 수 없다는 자체 기율도 잘 지켜졌다.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장준혁과 조강익 오월잇다 활동을 통해서 망월동 묘역을 참배하게 되었고 518청춘해설사가 되는게 이들의 꿈이다 ⓒ 민병래

 
오월잇다 활동을 하면서 망월동 묘역도 여러 번 참배했다는 강익이와 준혁이는 '518청년해설사'가 꿈이라고 묘역을 나오면서 말했다. 대학에 가든 사회에 진출하든 "518정신을 후배들이나 탐방 오는 분들에게 전달하고 싶다"며 "코로나 때문에 오월잇다 신입회원을 모으지 못해 안타깝다"고 했다.

민주의 문을 나설 때 이미 묘역에는 어둠이 내렸고 어디선가 나지막히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퍼지는 듯했다. 그 노래소리를 따라 철쭉 향기가 우리 어깨를 다독이듯 감싸주었다.

아이들과 헤어져 서울로 향하는 길에는 광주를 품은 무등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무등산은 예전에 '무돌'이라 불리웠다. 무돌이란 이름이 한자의 음과 훈을 빌리면서 무등, 없을 무, 같을 등 즉, 비할 바가 없는 산이란 뜻이 되었다.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을 비롯한 세계각국에서 벌어진 수많은 인권침해와 국가범죄 등은 지금까지 제대로 청산되지 못했다. 비록 발포명령자나 헬기사격에 대한 진상조사 같은 미흡한 부분이 있지만 광주는 6월항쟁과 촛불혁명을 견인했고 5.18특별법을 통해 진상규명·책임자처벌·명예회복·보상·기념사업 등을 이뤄냈다.

그래서 5.18항쟁은 우리 역사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사에서도 무등산이란 이름처럼 견줄 바없는 자랑스런 역사다.

게다가 계엄군의 최후통첩에도 "죽음을 무릎쓰고 도청을 사수하자"며 산화했던 투사의 후예들이 오월잇다의 강익이와 준혁이로 더 많은 고등학생과 청년들로 자라나고 있으니 5.18민중항쟁은 박물관에 모셔진 역사가 아니라 정녕 살아꿈틀대는 진행형 역사다.

그래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은 계엄군이 침공해 오기 전날 도청에서 가진 처음이자 마지막 외신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오늘 설령 진다고 해도 영원히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던 걸까? 그래서 그는 27일 새벽, 탱크와 헬기를 앞세우고 들어오는 계엄군에 겨우 카빈 소총 한 자루를 들고 의연히 맞섰던 걸까?
 
<못다한 이야기>
1. 오월잇다는 정확히 말하면 '시민과 함께 하는 오월광장의 35세이하 청년, 대학생, 고등부의 명칭이다. 2019년 고등학생회 회원들이 대학생이 되면서 대학생회로까지 확장되었다. 그들의 활동은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518plaza에서 만날 수 있다.
 
2. 전두환은 충정작전 직전, 서울에서 언론사 기관장과 만나 간담회를 하면서 황당한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폭도들이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합세를 강요하고 통반장을 협박하고 있다", "'있는 놈 때려잡자'는 구호가 등장했다", 그리고 "무장폭도가 광주교도소를 공격하고 있다" 등등이었다.
 
3. 조대부고 3학년 김영찬은 피격을 받고 마침 현장에 있던 공중보건의 정은택 등 시민들이 인근 병원으로 옮겨 응급처치를 받았다. 다시 전남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뒤 21일에야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총알이 오른쪽 복부를 관통하여 왼쪽 엉덩이로 빠져나가는 중상이었다. 장출혈이 심해 2m 이상 장을 잘라내고 다섯 번이나 수술을 받았고 20명으로부터 수혈을 받고서야 겨우 살아났다.
 
4. 고등학생들의 움직임은 항쟁 첫날부터 있었다. 5월 19일 대동고, 중앙여고, 광주일고에서 교내시위과 가두진출이 있었다. 20일에는 조강일(진흥고 3년)이 월산동의 덕림사와 덕림교회 중고등학교 모임에서 알고 지내던 10여 명과 함께 등사기를 빌려 유인물을 만들고 양동 닭전머리, 양동시장 골목에서 시민들에게 배포작업을 했다.
 
5. 당시 헬기사격에 대한 증언과 증거도 많다. 박금희(전남여상 3학년)은 이날 오후 기독병원에서 헌혈을 하고 나오다 헬기에서 쏜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전일빌딩 10층과 벽면에 새겨진 수많은 총탄 흔적은 국과수(국립과학수사연구원)가 2016년말 헬기의 기총소사 흔적이라고 밝혔다. 광주 양림동에서 사목활동을 하던 개신교 목사 아놀드 A. 피터슨도 헬기 기총소사를 목격했고 이를 사진에 담았다. 모두 자위권과는 거리가 공격적인 군사행위였다.
 
6. 광주는 5·18민중항쟁을 민주화 교육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 최근 광주광역시교육청이 중·고등학생을 위한 5·18민주화운동 인정도서를 개발, 초간본을 관내 학교에 배포했다. 오월을 중심으로 학교별 계기수업, 역사탐방이나 UCC 공모 등 각종 사업이 진행되어 학생들이 다양한 형식으로 오월을 배우고 있다. 오월에는 광주 어느 학교를 가도 입구에 오월정신 계승에 대한 현수막이 걸려있을 정도다.

7. 이 글에서 다른 피해사례와 항쟁사례는 대부분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2017년 판에서 인용했다. 

8. '오월잇다'가 4월27일 밝힌 입장문 전문은 아래와 같다.
 
안녕하세요.

이번 4/27 전두환 사자명예훼손 관련 재판을 앞두고 광주 5.18 서포터즈 오월잇다의 회원으로써 발언하게된 이한주, 노애진입니다.
 
1979년의 국가반란과 내란선동을 명령했으며 1980년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사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5.18민중항쟁을 폭동이라는 거짓으로 모욕하였으며 이는 내란세력에 맞서 싸운 광주시민뿐 아니라 국가의 민주화를 위해 몸바쳐 노력한 모든 이들을 능욕하는 행위입니다.
 
5.18민중항쟁의 진실은 이 나라의 하늘이 알고 이 나라의 땅이 알며 이 나라의 국민들이 알터인데 지금 이 시점까지 가소롭게도 범죄사실을 부인하며 사건을 은닉하려는 꾀를 부리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민주화를 위해 몸을 바친 영웅들의 후손으로서, 왜곡 당하는 역사에 분노함이 마땅하며 이러한 분노를 발판삼아 죄인 전두환의 추악한 실태를 알리고, 사죄를 받아내기 위한 투쟁을 이어 나가야 합니다.
 
4/27 전두환 사자명예훼손 재판을 앞두고 저희 오월잇다 대학생회에서는 20학번 새내기들을 중심으로 전두환을 주제로한 발표 활동을 통해 전두환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구성원들의 태도를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전두환의 성장 배경, 집권 배경, 처벌 방안 등의 발표 소주제를 나누고, 각각의 주제를 대학생회원들이 하나씩 맡아 발표를 준비하였으며, 준비과정 속에서 회원 개개인의 올바른 역사관과 의식수준을 함양하였습니다.
 
발표활동 후 저희들은 대학생으로서, 우리와 같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민주화에 목숨 바친 젊은 순국열사들의 의지를 어떻게 이어 나갈 수 있을까 라는 질문과 마주하였습니다. 그 해답은 무엇이 그들의 희생을 딛고 존재하는지 생각을 거듭하며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날 발포를 지시한 사람을 밝히지 못하고 국군의 작전을 승인한 국가를 정확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상조사를 위한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하였지만, 아직 그 활동에 진전은 없고 오히려 5.18민중항쟁을 왜곡하고 폄훼하는 자들만 늘어날 뿐이었습니다. 이는 사회를 현혹하며 지역 갈등을 심화시킵니다. 정부는 현재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쳐 희생하신 오월 영령들과 5.18민중항쟁을 왜곡하고 폄훼하는 이들에 대해 처벌하지 않고 있습니다. 국가는 이러한 반 역사적이고 비인도적인 행위를 하는 이들을 국가적 차원으로 강력하게 처벌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미국이란 존재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5·18 민중항쟁 당시 국가의 작전통제권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바로 미국입니다. 그러므로 국군의 이동과 집단 발포는 미국의 허가가 있어야 하였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이에 대하여 묵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국가에 요구합니다. 미국 정부에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차원의 요구를 뛰어넘어 반드시 관련한 정보를 빠짐없이 받아야 합니다.
 
현재 진행 중인 고 조비오 신부님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관련 재판에서 피고인 전두환은 이제 단죄를 피해 몸을 숨길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훼손으로 법정에 세워졌지만, 전두환은 모든 이들이 한마음으로 분노하는 이유를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모욕적인 언변으로 광주 5.18의 명예를 또다시 더럽힌 죄는 광주시민의 입장으로 절대로 용서할 수 없으며 해당 모욕은 바로 세워진 민주주의를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전두환에 대한 단죄가 곧 5.18민중항쟁의 시작이며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내란세력에 맞서 목숨을 걸고 민주화를 지켜낸 모든 영령들과 광주시민의 한을 풀어줄 유일한 답입니다.
 
5.18을 기억하고 왜곡하지 않기 위해서는 광주 시민의 의지가, 국민 여러분의 의지가 꼭 필요합니다. 그들의 희생과 맞바꾼 민주주의를 우리가 이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중요한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5·18민중항쟁의 희생으로 꽃피운 민주주의의 위에 선 사람으로서 전두환의 추악한 실태를 퍼트리고 그의 단죄를 위해 우리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 투쟁해 나갑시다. 저희들도 함께 힘을 모으겠습니다.
 
2020. 4. 27
 
오월잇다 회원 일동
 
<오월잇다와 도청복원투쟁 사진들>  
 

옛 전남도청 복원을 위한 청와대 앞 농성모습 2018년 6월 청와대앞 농성투쟁이 도청복원의 분수령이 되었다 ⓒ 오월잇다 제공

 
  

옛 전남도청 복원 범시도민 대책위 기념사진 2018년 11월14일 농성 800일을 기념해서 찍은 사진 ⓒ 오월잇다 제공

   

오월잇다 회원들이 세배드리는 모습 오월어머니들이 전남도청 복원을 위해 농성투쟁을 할 때 어린 학생들은 '도청지킴이'로 서포터즈 활동을 했다. ⓒ 오월잇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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