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2 18:52최종 업데이트 20.01.02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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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을 향한 인간의 본능은 자유를 향한 그것만큼이나 강렬하다. 긴 독재 끝에 마침내 민주주의라는 열매의 그 단물을 맛본 사회일지라도, 거기에 이르는 지난한 과정과 제도를 지켜가기 위한 번잡함은 명령과 복종의 단순한 질서로 작동하던 시절로의 회귀 욕구를 충동한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사회들이 독재 혹은 민주주의를 가장한 소수의 독재로 회귀하곤 한다. 시민 각자가 온전히 깨어있기를 포기할 때, 권력을 탐하는 간교한 소수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는 건 한순간이다. 깨어있는 인간은 현상을 자각하고 사고하고 표현하며 행동한다.

복종을 향한 본능의 비굴함을 일깨우고 자유의지를 최대치로 발현하게 하는 사회적 도구가 바로 예술이다. "창조하는 인간"은 최대치로 깨어있는 존재다. 예술은 끊임없이 세상을 다른 거울로 비추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며, 낯선 곳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간다.


프랑스 정치권에서 종교가 우파의 비밀무기라면, 문화와 예술은 좌파의 오랜 비밀병기다. 우파가 종교적 가치를 내세워 국민들의 사고를 복종의 세계로 길들여 가거나, 종교적 갈등으로 보수세력의 결집을 부추긴다면, 좌파 정치인들은 곳곳에 문화의 전당, 드라마센터를 세워 사회의 둘러싼 문제들을 예술의 필터로 다루고자 했다. 다양성의 가치를 확산시키고, 비판적으로 권력구조와 사회의 모순을 투시하는 인간, 주체적으로 문제의식을 표현하며 복종의 유혹에 투항하지 않는 인간으로 시민들을 향하게 해왔다.

한 공연기관의 의뢰로 전속예술단체를 둔 프랑스와 독일의 예술기관들을 구조를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뛰어난 예술적 성과를 보여온 예술단체들엔 예술가들의 자발성과 자유 의지가 최대치로 발현될 수 있도록 해주는 획기적인 민주적 운영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들을 발견했다.

천재들이 모여있다고 하여, 탁월한 예술적 성취가 절로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예술적 성과를 이루기 위한 노력만큼이나, 자신들이 속한 단체가 예술가의 역량을 최대치로 발현시킬 수 있는 구조를 갖출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런 틀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예술집단들이기도 했다.

[국립극장 코메디 프랑세즈] 운영 주체는 '단원'
 

코메디 프랑세즈 1680년 창단된 국립극단 코메디 프랑세즈가 상주하는 국립극장 코메디 프랑세즈. ⓒ besopha


1680년 설립된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극단이자 국립극장인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운영의 주체는 단원들이다. 공연 프로그램, 인사, 임금, 예산, 예술 프로젝트 등 극장의 모든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는 8인의 행정위원회는 극장 대표와 7인의 정단원들이 구성한다. 이 중 3인은 단원들이 투표로 뽑고, 3인은 대표가 단원들 중 임명하며, 1인은 최연장자 단원이다. 21세기 이후, 대표로 임명된 사람은 모두 단원 중 한 사람이었다.

결국, 이 8인의 위원회는 단원들이 꾸려가는 셈이다. 최연장자와 대표를 제외하고 매년 새로운 멤버로 교체되며, 권력의 집중을 막으며 모두가 고루 운영의 주체가 되게 한다.

이러한 운영 방식은 17세기부터 지금까지 유지되어온 전통이다. 고전 프랑스 연극 레파토리의 재창조를 그 사명으로 하는 이 극장의 평균 객석 점유율은 88%. 열정적 관객들과 에너지 넘치는 배우들로 채워지는 이 공연장이 배우들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에 문제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태양극단] 대표부터 신입단원까지 동일 임금
 

태양극단이 상주하고 있는 파리의 태양극장(Theatre du Soleil) 프랑스의 민간극단 태양극단은 1970년부터, 2차대전 이후 버려져있던 탄약제조 공장을 점거하여 지금까지 극장으로 사용해 오고 있다. ⓒ Michele Laurent


프랑스의 민간극단 중에 가장 전위적이며, 탁월한 독창성을 가진 극단으로 명성을 이어온 태양극단(Théâtre du Soleii)에는 1965년 설립 때부터 오늘까지 극단의 모든 성원들이 동일 임금을 받는 전통이 이어오고 있다. 극단 대표이자 설립자인 아리안느 므누슈킨부터 오늘 막 들어온 신입단원까지 모두 같은 월급을 받는다. 그들에게 극단이 벌어들인 돈은 서로의 일용할 양식을 평등하게 나누고, 다음 공연 준비를 위해 투입할 공동의 자산이다.

연출가와 배우는 역할이 다를 뿐, 극단이라는 배에 함께 올라탄 선원들이다. 지위의 고하를 나누지 않는 수평적 질서는 동일 임금이라는 강력한 상징성을 가진 시스템을 통해 설파된다. 신입 단원은 극단 대표와 중견배우들이 지원자들과 함께 2주간 워크숍을 하며, 서로 눈여겨본 지원자들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 방식을 통해 선발한다.

매일 진행되는 연습은 긴 토론으로 시작된다. 대본은 토론과 연습을 통해 끝없이 수정되며, 공동창작의 형식을 취한다. 태양극단은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지원금을 중단없이 받아온 민간 극단이지만, 정부가 민중의 뜻을 배반할 때마다 선봉에 서서 투쟁에 나서는 극단이기도 하다. 자신들에게 지원금을 주는 사람들은 정부가 아니라 프랑스 시민들이며, 그 시민들이 구성하는 이 사회가 정부의 독단으로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예술가들이 제 몫의 소리를 내야 한다고 여긴다.

[베를린 필] 단원 직선으로 뽑는 수석 지휘자

옆나라 독일의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서는 한층 더 강력한 민주적 시스템이 작동한다. 지휘자 벤야민 빌제가 만든 민간 오케스트라단에서 활동하던 연주자들이 지휘자의 착취를 견디지 못하고 나와 만든(1882년) 것이 바로 오늘의 베를린 필하모니다. 그들은 더 이상 어떤 지휘자도 연주자들 위에 군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지휘자 직선제를 도입했다. 그 전통은 오늘까지 이어져 온다.

지휘자뿐 아니라 신입 단원을 뽑을 때도 마찬가지다. 예외 없이 공개 콩쿠르의 형식을 취하며, 그 콩쿠르에 청중으로 참석한 단원들은 심사위원이 되어 투표로 단원을 선발한다. 지휘자가 자신이 선호하는 새 연주자를 단원들의 동의 없이 입단시킬 수 없다.

지휘자에게 단원 채용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고의 권한도 없다. 베를린 필은 4명의 공동 집행위원회가 대부분의 중요한 사안들을 결정한다. 그 4명 중 둘은 단원 투표로 뽑힌 연주자들의 대표이고, 1명은 수석 지휘자, 1명은 행정책임자다.

베를린 필은 민간 오케스트라로 시작되었으나, 히틀러 치하에서 제국 오케스트라 시절을 거쳐 2002년까지 베를린시에 속해 있는 공공 오케스트라로 존재해왔다. 2002년부터는 좀더 독립적인 형태를 찾아 공익재단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여전히 국가와 베를린시로부터 연간 230억 원이 넘는 지원금을 받고, 시 소유의 콘서트홀에 대한 사용권을 양도받지만, 오케스트라 운영에 관한 대부분의 사안들은 정부나 시의 간섭없이 단원 대표 2인을 포함한 공동 집행위가 결정한다.

누구도 절대적으로 군림할 수 없다
 

라디오 프랑스 오디토리엄 프랑스 국영 라디오 방송국의 전속 오케스트라인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니의 연주 장면. ⓒ 라디오프랑스


파리의 오페라 바스티유 오케스트라,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니 등 프랑스의 공공 예술기관에 상주하는 오케스트라, 합창단원들은 모두 콩쿠르를 통해 공개적으로 선발되며, 그들을 선발할 때 심사위원은 다수의 단원들과 수석 지휘자, 혹은 객원 지휘자다.

수석 지휘자는 심사의원들 중 1인일 뿐이다. 수석 지휘자는 예술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객원 지휘자들을 선임할 권리와 책임을 갖지만,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작품 해석에서, 단원들은 지휘자와 치열하게 토론하고 논쟁한다. 지휘봉을 들었든, 바이올린을 들었든, 그들은 같은 배를 타고 하나의 화음을 만들어 가는 음악의 공동체이며, 그 누구도 다른 사람 위에 절대적 권위로 군림할 수 없다.

프랑스에서든 독일에서든 공개 채용된 단원의 실력을 오디션을 통해 재평가하는 일은 없다. 일부 단원이 슬럼프에 빠지거나, 전과 같은 실력을 유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유예기간을 두고 실력을 향상 시킬 수 있도록 지원한다. 슬럼프를 해고할 기회로 삼지 않는다. 독일 오케스트라 협회에선 기존 단원에게 재오디션을 실시하는 건 '불법'이라 하며, 파리에 본부를 두고 전세계 60개국의 음악가 단체들이 회원국으로 있는 국제음악가연맹(FIM)에서는 재오디션을 예술가들에게 지나친 스트레스를 유발해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행동이라고 단언한다.

재정적으로 지원하면서도, 그들의 독자성과 자유로운 예술적 본능이 훼손되지 않도록, 일체의 간섭으로부터 물러서 있는 공기관의 분별력 또한 예술가들이 예술의 본령을 향해 갈 수 있게 해주는 신성한 조건이다. 코메디 프랑세즈, 파리 오페라,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니, 태양극단은 모두 국가의 지원을 받는 예술단체지만, 예외 없이 현 연금제도를 파기하려 하는 마크롱 정부와 맞서 싸운다. 지배세력으로부터 빼앗아온 시민의 권리를 지켜내는 것은 시민 전체의 의무이며, 예술가로서의 존립기반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1세기 한반도 남쪽에선, 예술단원들을 주기적으로 재오디션하여 해고하고, 정치적 성향에 따라 예술가나 예술단체의 밥줄을 끊어 놓거나, 그러한 사실이 드러나도, 어떤 법적 조치도 취해지지 않는 관행이 반복된다. 그런 일은 마치 감흥 없이 돌아가는 회전목마처럼 끊임없다. 공권력과 자본, 윗사람의 요구에 고분고분 따르는 예술을 요구하는 세상에서, 예술은 질식한다. 획기적인 예술적 도약은 예술단체 구조의 혁신과 함께 할 때 도달할 수 있는 열매다. 히딩크가 2002년 월드컵대표팀에게 마지막 요구했던 한방울의 묘약이 선수단 내에서의 상하질서를 깨는 "야자"였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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