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19 11:03최종 업데이트 19.12.19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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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행진하는 '연금개편 저지' 시위대 프랑스 파리에서 정부의 연금 개편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이날 프랑스 전역에서 정부의 퇴직연금체제 개편에 반대하는 제3차 총파업 대회가 진행됐다. ⓒ 연합뉴스/AP

 
12월 17일, 다시 거리에 180만이 모였다.

지하철이 끊기고, 버스와 철도는 1/3만 다니며, 대학이 문을 닫고, 공연들이 줄줄이 취소되며, 퇴근길 도로에서 3~4시간씩 서 있게 된 지 2주째다. 철창이 굳건히 내려진 지하철 입구를 확인하곤 말없이 씽씽카를 몰며 갈 길 가는데 익숙한 파리 시민들 아니던가. 사람들은 재깍 파업모드로 삶을 전환했다. 재택근무를 하거나, 공용 전기자전거를 타고, 껑충 값이 뛰어오른 우버를 부르거나, 카풀을 하면서, 진흙탕 속 전쟁이 되어버린 출퇴근 길을 14일째 견뎠다.


무인 운전 노선인 1번과 14번 지하철, 어쩐 일로 4대 중 3대 정도가 작동하는 트램 등을 이용하여 사람들은 곡예하듯 불편해진 도시를 살아간다. 시민들의 인내심이 점점 바닥나지만, 원성은 지하철을 멈춰버린 노조가 아니라, 거대한 거리의 함성에 귀 막은 엘리제궁을 향한다.

전날 장 폴 들레부아 연금개편위원장의 전격 사임으로 마침내 이 연금개편을 둘러싼 전쟁에서 시민군들은 첫번째 작은 승리를 얻은 듯한 분위기다. 연금 개편의 특임을 맡고 1년 전 고위관료가 된 그는 공직자 겸임 방지 법에 의거, 신고해야 했던 유급·무급 직책을 13개나 감추고 있었고, 언론은 그의 치부를 생중계하듯 매일 새롭게 꺼내놓았다. "망각"을 핑계 대며 버티던 그가 마침내 항복하고 떠나자, 사람들은 일제히 외쳤다. 들레부아와 함께 그가 설계한 연금개편도 함께 떠나라고.

연금 개편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쟁의 한복판에서, 특권을 13겹으로 껴입고 있다가 들키며 벌어진 쇼는 이번 연금개혁의 본질을 전시하는 한편의 우화였다. 주머니가 터지도록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제 특권을 더욱 두텁게 하기 위해 다른 시민들의 옷을 벗기고 있다는 자각이 사람들 머릿속에 스며 들어갔다.

"평등"이라는 기만  
 

연금개편 구체안 발표하는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 필리프 프랑스 총리가 11일(현지시간) 파리에서 열린 경제사회환경위원회(CESE)에서 출석해 연금 개편 구체안을 발표하고 있다. CESE는 헌법에 근거한 사회적 대화기구다. ⓒ 연합뉴스/EPA

 
마크롱의 연금 개편 골자는 정년을 62세에서 64세로 연장하고, 42개에 달하는 각종 특수 연금체계를 하나로 통합한다. 그리고 공무원은 마지막 6개월 월급을 기준으로, 민간 부분은 가장 잘 벌던 25년 동안의 임금평균을 하던 기준을 모두 공평하게 평생 일하며 벌었던 임금을 기준으로, 각자 일한 시간만큼 쌓은 포인트를 연금으로 정확히 환산한다는 얘기다.

얼핏 그럴듯해 보인다. 특권을 떼버리고 모두 같아진다는 얘기엔 귀가 솔깃하다. 문제는 모두가 함께 좋아지는 게 아니라 함께 바닥으로 내려간다는 것이다. 평등의 개념을 오용한 최악의 사례로 꼽힐 만하다. "너희들은 더 오래 일해야하고, 삶은 더 비참해져야 한다"는 것이 소위 이번 개혁안이다.

좋아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이 개편안을 좋아하는 유일한 단체는 MEDEF(프랑스 기업인 연합)다. 기업의 어려움을 일찍이 굽어살피고 있는 마크롱 정부는, 각별히 기업의 부담을 더는 방식으로 제도를 설계했다. 극좌정당(France Insoumise) 대표 멜랑숑은 이로써 마크롱이 부유세 폐지를 비롯해 부자들을 향해 베푼 선물이 430억 유로(약 56조)에 이른다고 국회에서 폭로했다.

정부는 이번 개편안의 최대 수혜자는 여성이라고 떠벌였지만, 여성은 출산 등으로 남성에 비해 일한 기간이 짧은 경우가 많다. 지금도 남녀 간 25%의 연금 수령액 격차가 있는 상태다. 개편안은 "평등의 이름으로" 이 격차를 38.8%로 넓힐 참이다.

연봉 12만 유로(약 1억5600만원) 이상인 사람들은 더 이상 국민연금 분담금을 내지 않고, 민간 보험 상품에 가입하도록 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이는 국가와 사회가 함께 책임지던 모두를 위한 연금시스템을 깨고, 연금 금고에서 고소득자들의 몫이 줄어드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개인 연금 시장을 열어 젖히겠다는 의도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

남들보다 고된 노동조건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설계된 특수연금제도들이 있다. 지하철, 철도 기관사, 소방관 같이 밤낮 없는 근무조건을 견뎌야 하는 사람들. 남들이 잘 때 일어나 세상을 움직였던 사람들에 대한 뒤늦은 보상인 셈이다. 그런데 이 특수연금 제도를 남용했던 자들도 있다. 상원의원에는 6년간의 임기를 마치면 바로 2190유로(약 285만 원)의 연금이 투척되고, 거기에 나머지 연금들이 더해지는 각별히 아름다운 연금이 있었다. 특권과 고생에 대한 보상을 통합이란 말로 퉁치며, 모두를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 그것은 과연 "평등"인가?

최저 연금이 1천유로(약 130만 원)가 되게 하겠다고 공언하고 있지만, 이는 연금 만기 연한인 41년 3개월을 풀로 채운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최저연금이다. 20세부터 62세까지 한 해도 쉬지 않고 일해야 채울 수 있는 이 조건을 충족시킬 사람은 많지 않다. 결국 빛 좋은 최저연금 1천유로는 가게 문 앞에서 고객님의 정신을 쏙 빼주는 인형일 뿐이다.

일간지 <메디아빠르(Mediapart)>는 마크롱표 연금의 본질을 요약했다.

"마크롱에게 이번 연금 개편은 프랑스를 신자유주의 사회로의 완벽한 전환을 위해 밟고 있는 악셀레이터."

"늙은 노동자의 존엄한 여생을 위하여"
 

태양극단의 대표, 연출가 아리안느 므누슈킨 프랑스 연극계의 신화, 80대의 고령인 아리안느 므누슈킨이 태양극단 단원들을 이끌고 집회에 참석했다. "모든 삶들을 위한 연금, 정의를 위해서 이 자리에 나왔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던 은퇴 이후의 삶에 이르러선 모두 편안하기를, 부의 재분배를 하는 연금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정의다"라고 발언하고 있다. ⓒ 동영상 캡처


1945년, 전쟁의 총성이 멎고 마침내 나치 통치에서 벗어난 프랑스 임시정부가 새 헌법보다 먼저 만들었던 것이 바로 보편적 사회보장 제도였다. 의료보험, 노령연금, 가족수당. 1945월 10월 탄생한 임시정부의 연금제도는 "늙은 노동자가 남은 생을 존엄하게 마감할 수 있도록 해주려는" 소박하고도 숭고한 뜻을 담고 있었다. 모든 일하는 사람들이 분담금을 냈고, 65세까지 일한 노동자는 기준 임금의 40%를 받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제도 시작 3년차인 1948년에 이미 65세 이상의 63%가 연금의 수혜자가 될 수 있었다.

그 때부터 연금제도를 지탱하는 정신은, 다른 사회보장 제도가 그러하듯, '사회적 부의 재분배' '연대를 통한 사회정의의 실현'이었다. 많이 번 사람은 많이 내고, 적게 벌거나, 일할 수 없었던 사람도 노년에 이르러 모두가 적어도 존엄한 여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사회를 그들은 꿈꿨고 조금씩 실현해 갔다.

"크리스마스를 길에서 보내도 좋아. 크리스마스는 또 오지만, 우리의 연금을 부수면 다시 고치긴 힘들지. 우리의 연금을 구해야 해." 집회에 나온 한 할머니의 말이다. "우리는 더 정의로운 연금, 우리가 살면서 겪은 모든 불의들을 교정할 수 있는 연금이 되기를 희망한다." 단원들을 이끌고, 파리 집회의 선두에 선 프랑스 연극계의 전설, 태양극단의 대표 아리안 무느슈킨의 일갈이다. 두 여성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에 빠진 연금을 구하러 거리에 나온 모든 프랑스 시민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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