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18 09:06최종 업데이트 19.12.18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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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 와인동굴에 갔다. 세 번 갔는데 모두 다 와인 때문에 갔고, 이번에도 '2019 광명동굴 대한민국 와인 페스티벌'(12월 13일~15일)이 있어서 갔다. 동굴이라면, 수학여행 때 간 울진 성류굴, 웅장하고 화려한 삼척 환선굴, 넓고 긴 제주의 만장굴, 해외여행에서 더러 가본 기억도 안 나는 동굴들의 추억을 나는 가지고 있다.

게다가 광명동굴은 수억 년이 만든 천연동굴이 아니라, 사람이 60년 동안 파 들어간 동굴이 아닌가? 그래서 별로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았는데, 와인 행사를 핑계 대고 지인 몇몇과 자가용을 버리고 찾아가면서 동굴 속을 들어가 보았다. 동굴이 여름엔 피서지이고 겨울엔 따뜻하다고 하니 겨울 온기도 느껴보자는 말과 함께.


광명 동굴은 도시재생동굴이었다. 바로 옆에는 굴뚝이 산 높이로 솟아있는 쓰레기 소각장이 있었다. 폐광이나 쓰레기 소각장이나 그 운명이 닮아 있었다. 둘 다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이라, 흉하다고 외면할 수가 없다. 그런 폐광이 최근 10년 사이에 가장 각광받는 수도권 관광지가 되었다니, 도시 재생과 순환 모델로 높이 평가할 만했다.

광명동굴은 금광동굴이었다. 1912년에 일본인이 개발하여 침탈의 현장이 되었다. 일제가 우리 몸의 장기를 떼가듯이 우리 땅을 파서 금을 캐갔다. 동굴 입구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이 그 사실을 환기시키고 있었다.

광명동굴은 암반동굴이었다. 동굴에 들어서니 습기가 없었다. 천연 석회암 동굴들은 땅 속에 스며든 물이 만들어낸 공간이라 물방울이 떨어지고 습한데, 이곳은 바위를 파고 들어간 웅장한 조각품 같은 암반동굴이었다.

1972년까지 채광이 이뤄졌는데, 광산에서 캐낸 광석 부산물들이 홍수에 쓸려 마을을 덮치고 땅을 오염시켜 그 보상 문제가 커지면서 광산의 운명은 끝났다. 동굴은 지상에서부터 지하 275m까지 9개 층으로 총 길이 7.8㎞ 갱도가 있다. 내게 가장 신비로웠던 공간은 맑은 물이 가득차 있다는 동굴 호수였다.
  

광명동굴 안의 동굴광장에서 레이저쇼가 펼쳐지고 있다. ⓒ 막걸리학교


광명동굴은 판타지 동굴이었다. 350명이 함께 들어가서 공연을 볼 수 있는 동굴 광장에서는 레이저 쇼가 펼쳐지고, 곳곳에 영화와 게임 속에 등장한 캐릭터와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판타지 영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골룸과 마법사 간달프의 지팡이가 있고, 41m 길이의 용이 있고, 윗도리가 찢어진 헐크도 있었다. 현실과 가상 세계가 뒤섞인 판타지 산업의 현장이란다.

광명동굴은 이쯤만 둘러보아도 스토리텔링에 관심있는 인문학도나, 지질학에 관심 있는 자연과학도나, 판타지 게임에 빠진 소년이나, 재난을 대비하는 프레퍼(prepper)족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유료 입장객이 1년에 100만명이라니 톡톡히 지역 경계에 보탬이 되고 만족도가 높은 관광 동굴이자 스토리 동굴이다.
 

광명동굴 안의 한 갈래에 와인동굴이 있다. ⓒ 막걸리학교


이 동굴의 마지막 구간에 와인동굴이 있다. 와인의 종류와 제조 과정이 소개되어 있고, 150여 종의 한국 와인을 시음하고 판매하고 있다. 동굴 안에서 입장료 3천원의 공포체험관 말고는 추가로 돈을 쓸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동굴의 또 다른 수입이 생기는 곳이자, 국산 와인의 최고 매출이 이뤄지는 곳이다. 2015년 4월에 와인동굴 주제관이 생긴 이래로 2019년 10월까지 국산 와인 18만5천병이 팔렸고 34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그래서 광명동굴이 광명와인동굴이라고 불리고, 해마다 와인 페스티벌을 연 것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와이너리들은 땅을 파서 와인을 저장하고 싶어한다. 변하지 않는 서늘한 온도에서 진동없이 빛없이 숙성할 수 있는 동굴이라면 더 좋다. 그렇다고 꼭 와인만 동굴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숙성될 수 있는 모든 것은, 하물며 명상하는 인간까지도 동굴을 좋아한다. 광명동굴도 1980년대 초반부터 2010년까지 소래포구의 새우젓 숙성 동굴로 쓰였다.

200ℓ짜리 새우젓 드럼통이 1년에 1만 원씩 내고 3천통씩이나 12~15℃의 1㎞ 갱도에서 숙성됐었다. 지금은 새우젓 냄새는 빠졌지만, 숙성의 이미지는 한국 와인이 물려받았다. 소믈리에로 공무원이 된 최정욱 광명와인동굴 소장은 "한국 와인이 이곳에 한데 모여 소개되면서 생산자나 소비자 모두에게 존재감을 갖게 되었고, 이곳에서 와이너리들끼리 서로 경쟁하면서 품질이 좋아진 게 지난 5년의 성과입니다"라고 평했다.
 

광명동굴에서 대한민국 와인페스티벌이 열렸다. ⓒ 막걸리학교


동굴을 나와 와인축제장을 갔다. 와이너리 24곳이 참여하여 시음 행사를 하고 있었다. 한국 와인 산업의 초창기는 마주앙이 상징하는 대기업 중심이다가, 1987년에 와인 수입이 자유로워지면서 2000년대에 와인붐이 일어 수입 와인이 시장을 주도했다. 그 사이에 대기업 중심의 국산 와인은 가뭇없이 소멸되어 버렸고, 호텔이나 레스토랑에서 마시는 와인은 수입 와인들로 가득차 버렸다.

그런데 2010년대에 들어 충북 영동과 경북 영천을 중심으로 포도와인이 성장하고, 무주에는 머루와인이 터를 잡고, 의성과 예산에 사과와인이 안정된 기반을 구축하면서 광명에서 집결할 수 있을 만큼 세력을 모은 것이다. 이들 와이너리들의 공통점은 과수원을 직접 운영하면서 와인을 빚는 농가형 와이너리라는 점이다.

그 사이 호텔에 근무하는 소믈리에들의 태도로 사뭇 달라졌다. 메리어트 호텔 정하봉 소믈리에만 해도 100회 넘도록 와인 디너쇼를 하면서 한 번도 한국 와인을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매달 한국 와인으로 디너 행사를 할 정도가 되었다.

그 동력을 한국와인생산자협회 정제민 회장은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한국 와인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농가를 기반으로 한 한국 와인들이 지역 문화와 결합하여 스토리텔링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이런 변화가 와인을 한 병도 생산하지 않는 광명시로 하여금 와인동굴과 와인연구소를 만들어 지역 문화와 한국 와인을 결합시키는 상황까지 만들게 한 것이다.

광명동굴은 광명 암반동굴, 광명 금광동굴, 광명 인공동굴, 광명 판타지동굴, 광명 역사동굴, 광명 와인동굴 그 어느 쪽으로 불러도 될 만큼 이야기가 풍성한 관광 동굴이다. 그 다채로움 속에서 한국 와인은 광명동굴에 와서 소중한 이야기를 얻었고, 광명동굴은 한국 와인을 통해서 한국의 농가들과 연결되어 해마다 성장하는 흥미로운 콘텐츠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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