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11 07:54최종 업데이트 19.12.11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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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러코스터. 하강이 시작될 때 최고의 공포를 느낀다. ⓒ wikimedia commons


얼마 전, '가족 살해 후 자살' 사건들을 취재한 신문기자와 얘기 나눌 기회가 있었다. 한 때 '동반자살'이라고 불렸던, 어린 자녀를 포함한 가족들을 먼저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요즘도 계속 이어진다. '송파 세 모녀 사건' 이후로 성인 가족들이 함께 목숨을 끊는 일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

그 사정들을 자세히 취재한 기자의 말이 인상 깊었다. 당장 끼니를 해결 못 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태보다는 아직 전세금이나 자가용 등 자산이 남아있는 경우가 더 많더라는 것이다. 실직, 질병, 사고 등 이유로 어려움이 닥쳐오는 상황, 말하자면 미끄럼틀 경사가 막 시작되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미끄럼틀, 혹은 롤러코스터를 탈 때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 바로 그렇게 경사가 막 시작될 때다. 하강 구간이 지나면 안전하게 지상에 도달하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그 긴장을 견딜 수 있고, 짜릿함을 느끼기도 한다. 만일 하강이 계속 이어지다 파괴적 충격, 죽음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면 어떨까? 하강 순간에 짜릿함은커녕 극도의 공포만 느낄 것이다. 사회적 하강 충격에 따른 공포와 절망에 대해 사회적 대책이 필요한 이유다.

추락의 공포

우리 정부도 대응을 하기는 한다. 위기 가정을 찾아내기 위해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를 활용한 시스템을 도입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일단 주민센터에 방문하기만 해도 지원 받을 제도가 많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단지 '홍보'가 문제인 것일까?

실제로는 최첨단 시스템으로 위기가정을 찾아놓고도 해당 예산의 한계로 다 지원을 못 하고 있다고 한다. 각종 지원 제도들도 있기는 하지만, 어느 달에는 노인 예산은 소진됐고 한부모 예산은 남아있다든지, 어느 프로그램은 중위소득 120~150% 사이만 신청할 수 있다는 둥 갖은 칸막이와 제한이 있다. 때문에 관공서를 방문했다가 거절만 당한 경험, 그 때 느낀 모멸감과 좌절감은 아직 그 일을 겪지 않은 사람들조차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일반적인 것이 됐다. 이 시대 한국인들이 공유하는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이라고까지 할 만하다.

아무런 안전망 없이 추락하다가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도 지키지 못하는 참혹한 상태가 되리라는 공포. 그것이 가족들의 죽음이라는 참혹함보다도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물론 자녀를 포함한 가족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겨 임의로 목숨을 빼앗는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서받을 수 없다. 다만 이런 현상이 계속된다면 그 원인에 대한 사회적 고민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제 하의 정부가 없는 것도 아니고, 정부 예산이 없는 것도 아니고, 행정 시스템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우리에게는 추락을 어느 선에서 막아 줄 안전망이 없을까? 답은 간단하다. 그런 '선'을 정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선이 없다

우리 사회에는 '최저선'에 대한 개념이 없다. 이 사회의 구성원 중 누구라도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이런 정도 이상'은 보장해 준다는 개념이 없는 것이다.

정책 입안자들은 대부분 한국 사람들이 여전히 경제 성장기 속에서 '상승' 중인 것으로 여기는 듯하다. 웬만큼 노력하고 성실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는 사회라고 보는 것이다. 간혹 운이 없거나 노력이 모자라서 '하강'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눈 높이만 낮추면 다른 일자리를 얻을 것이고, 그도 못 하는 사람들은 소수이니 만큼 정부가 다 책임질 수는 없다는 식이다.

이런 태도가 보이는 단적인 사례가 한국도로공사 톨게이트 노동자들을 두고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없어질 직업이 아니냐"고 말했다는 일이다. 지금도 산업 및 기술 변화로 없어지는 일자리는 셀 수 없이 많고 앞으로도 얼마나 될지 모르는데, 정부는 그 가운데 사람들이 겪는 불안정을 그저 '각자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최근 몇 달 동안 한국 사회가 '개천에서 용 나는 방법'을 두고 벌인 뜨거운 논쟁에 비하면 이런 '하강'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이렇다보니 우리 사회에서는 최저선이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에 대한 토론은 벌어질 여지조차 없고, 이를 위한 제도도 만들어진 적이 없다. 최저선으로 '국민기초생활보장제'가 있지 않느냐고 반론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이미 빈곤층에 속해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제도다. 그리고 그 빈곤층이 빈곤층'답게' 살 수 있는 정도로만 지원한다. 누가 봐도 극심한 가난 속에 있더라도, 부양의무자 조건을 충족 못 하거나 일시적으로 소득이 발생하는 등 사정이 있다면 이 제도는 책임지지 않는다.
 

서울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이 정규직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 이희훈

 
최저선과 평균선의 혼선

'최저임금'이라는 제도가 있다고도 반론할 수 있다. 최저임금이야말로 한국 사회 안에 '최저선'과 '평균선'에 대한 인식에 혼선이 있음을 보여주는 제도다.

최저임금이란, 어떤 사람이 어떻게 일하더라도, 심지어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라도, 보장해줘야 하는 금액이다. 왜 그런 사람에게까지 일정 수준의 임금을 줘야 할까? 그 사람에게도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엄하게, 일정 수준 이상의 삶의 질을 누리며 살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낮은 생산성으로 발생하는 손실은 사회 전체가 나눠 부담해야 한다. 그래야만 최저선 이하로 사는 사람이 없는 사회가 될 수 있다. 이런 합의 하에서야 비로소 최저임금은 제대로 기능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최저임금은 언젠가부터 전체 노동 인구의 평균적 임금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제도인 것처럼 다뤄진다. 현 정부가 소득주도성장 기조 하에 가장 강력하게 밀어붙인 것이 '최저임금 인상'이었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상된 최저임금에 대해 다수의 고용자들은 "이런 정도 노동에 그만한 금액을 지불할 수 없다"고 반발하고 나왔다. 차라리 일자리를 없애거나 기계로 대체하겠다는 주장이 얼마나 현실화 됐는지는 전문가들마다 분석이 엇갈리지만, 이런 반발이 나왔다는 자체가 최저선에 대한 합의가 부족했다는 방증이다. 이렇게 큰 갈등 하에서 최저임금을 한 번 크게 올린 것은 우리 사회에 어떤 유익이 있었을까?

'최대 주 52시간 노동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OECD 회원국 중 최장 시간 노동 국가라는 오명을 하루 빨리 벗어야 하더라도, 최저선을 '주 52시간'으로 맞추려면 사람이 주 52시간 이상 노동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에서도 노동계에서도 평균적 노동자들이 누리는 적정 노동시간의 선이 주 52시간 이하인 것이 바람직하다는 식의 설명들만 나왔다. 이를 '평균선'으로 본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제도는 '어기면 처벌 받는' 최저선으로 작동한다. 그러니 기존의 최저선 경계에 있던 노동 현장들에서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다.

정부가 중소기업에 대한 적용 또는 처벌 유예, 탄력근로제 단위 기간 확대 등 보완책을 고민하는 것부터가 '주 52시간'을 '최저선'으로 보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런 가운데 탄력근로제 단위 기간을 두고 노사, 진보와 보수 진영의 대립이 계속되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끌어올려야 할 최저선

차라리 이럴 바에는 정부가 큰 틀에서 "노동의 최저선을 끌어올리겠다"고 선포하고 사회적 합의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어땠을까 싶다. 김용균씨 사망 사건 전후로 사회적 요구가 커진 안전의 문제부터, 어떤 일을 하건 인격적인 존중을 받고 차별받지 않는다는 의미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랬다면 최저임금 인상, 최대 52시간 노동제도 모두 그 맥락 안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더 이상적으로는 '이 땅에 있는 누구나 누려야 할 삶과 노동의 질'에 대한 논의가 이뤄진다면 어떨까? 외국인 노동자와 난민을 포함해서 대한민국에서 사는 사람은 누릴 수 있는 최저선으로 말이다. BTS 보유국, 문화 강대국이라면서 한국에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노예만도 못 한 환경에서 일 한다는 소식은 그만 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논의의 결과를 제도로 만든 것이 바로 북유럽의 복지국가 시스템이다. 북유럽이라고 해서 태초부터 복지국가였던 것이 아니다. 스웨덴의 경우 복지국가 논의는 1920년대 시작됐지만 지금 같은 형태로 정착된 것은 1970년대 이후다.

처음 복지국가에 대한 고민은 노동자가 병이 나거나 실직했을 때, 은퇴하고 난 후에도 보호받도록 사회 안전망을 촘촘히 하자는 데서 시작했다.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 선별복지가 아닌 보편복지를 지향한 것은 '인간의 품위'를 지키는 데 더 적합하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복지국가 시스템을 근대화 했다고 평가 받는 올로프 팔메(1927~1986) 총리 시절 사민당은 연령에 따른 노동자 차별 금지법, 노동조합 보호법, 노동자 안전 강화법, 노동자의 경영 참여 보장 등 법 개정을 통해서 '노동의 최저선'을 대폭 끌어올렸다. 대학 등록금 무상화, 연간 의료비 상한 설정 등으로 기존에 가구별로 떠안았던 부담들도 줄였다.

생활의 최저선도 정해졌다. 스웨덴은 지역마다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가구 수에 따라서 일정 면적 이상의 집에 살아야 하고, 영양 균형에 맞춘 식사를 해야 하고, 통신과 여가 생활의 권리를 어느 정도 누려야 한다는 등 세부적 기준까지 정해져 있다.

하강 앞둔 대한민국이 해야 할 일

"여기서는 사람들이 월세를 못 내서 쫓겨나면 호텔로 들어가 버려요. 그들이 새 거주지를 찾을 때까지 시 정부는 호텔비를 내줄 의무가 있어요. 때문에 예산을 아끼려면 월세를 못 낼 위기에 있는 사람들을 선제적으로 찾아내 지원해야 합니다."

지난해 스웨덴 말뫼를 방문했을 때 만난 주민 지원 담당 공무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런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는 물론 돈이 든다. 스웨덴 사람들은 높은 소득세율을 감당하는 대신 "어떤 경우에도 사회가 나를 떠받쳐 준다"는 안정감을 누리는 것이다.

한국에도 가용한 자원들은 있다. 부처별, 지자체별로 중구난방 써오던 것을 잠시 멈추고 '최저선'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이미 가진 자원만으로 북유럽 수준만큼은 아니어도 최소한의 안정감을 주는 최저선은 마련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런 경험으로 사람들이 제도의 효용성을 느낀다면 세금 인상을 위한 사회적 합의도 가능할 수 있다.

물론 그 어느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한국은 점점 더 변동을 크게 겪게 되리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직장을 잃는 사람,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하는 사람, '하강'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개천에서 용 나는 방법'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를 존엄하게 지켜 줄 '최저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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