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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19.11.20 19:03 수정 2019.12.03 18:25

홍커우 공원의 윤봉길 의사 생애사적 전시관 내부에 윤 의사의 동상이 마련돼 있다. ⓒ 류승연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정작 그 폭탄을 누가 만들었는지 아는 이는 드물다. 일제에게 쫓기던 백범 김구 선생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중국에서 어떻게 일본의 감시망을 피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독립투사들을 도왔던 중국인들의 지원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중국인 향차도(向佽濤)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 계획을 듣고 도시락, 물통 폭탄을 준비했다. 일제가 김구 선생의 뒤를 쫓을 때는 중국 사회운동가 저보성(褚輔成)이 피난처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중국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를 광복군의 '무관양성소'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도 국민당 총재 장개석의 지원이 없었다면 어려운 일이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지난 11일부터 사흘간 상하이, 자싱, 항저우, 난징 등 임시정부 독립투사들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 그리고 그 여정의 매 순간마다 '중국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한국교직원공제회가 주최하고 <오마이뉴스>가 주관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42명의 학생 및 교직원이 동참했다.
 
우리나라 독립투사들 여정에 '중국인' 있었다
 
호숫가 옆 벤치에 앉아 가을을 감상하는 중년 여성부터 테이블을 둘러싸고 모여앉아 흥겹게 마작을 즐기는 백발의 노인들까지 평일 오전 중국 상하이에 위치한 홍커우 공원의 시간은 느긋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가 이곳에서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는 사실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곧, 한 중국 노인에 의해 당시의 역사가 되살아났다. 홍커우 공원 입구쪽에서 기자를 발견한 노인은 "한국인이냐"고 묻더니 물 적신 붓으로 바닥에 한글 몇 자를 적었다. 곧 흰 벽돌 위로 '당대 영웅 윤봉길 의사 영원히 기념 우리의 독도! 주권 KOREA'라는 글자가 검게 떠올랐다.
 

홍커우 공원에서 만난 중국 노인이 물 적신 붓으로 바닥에 한글 문장을 쓰고 있다. ⓒ 류승연


25살의 청년 윤봉길이 의거했던 1932년은 임시정부의 침체기이기도 했다. 계파 갈등과 재정난 등으로 인해 임시정부의 명맥만 간신히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청사의 집세는 밀리기 일쑤였고 김구 선생의 가족들은 주워온 배추 껍질을 끓여 연명했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임시정부를 '거지의 소굴이었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당시의 침체된 분위기를 반전시킨 건 윤봉길 의사의 의거였다. 독립운동가 김홍일과 절친한 관계였던 중국인 향차도로부터 도시락, 물통 폭탄을 전달받은 그는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 축하 행사가 이뤄졌던 4월 29일 홍커우 공원에 숨어들었다. 정오께 물통 폭탄을 던져 의거에 성공했다. 이 의거로 일본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가 즉사했다.
 
국민당 총재 장개석은 "우리 중국 사람들도 하지 못한 일을 한 명의 조선 청년이 했다"고 감탄했고, 1933년 5월 김구와 만난 후부터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윤 의사의 의거로 일제는 김구 선생에게 현상금 60만 은화를 거는 등 임시정부를 압박해 왔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200억 원이 넘는 돈이었다. 결국 상하이를 떠난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는 각각 가흥과 항저우로 흩어졌다.
 
목숨 걸고 백범 김구 도왔던 '그들'의 이름
 
정갈하고 운치 있는 중국식 골목 사이로 투박하게 세워진 이층짜리 건물. 깔끔하게 단장된 내부와 달리, 세월의 흔적을 머금은 가구들이 퀴퀴한 냄새를 뿜어내던 곳. 일본에 쫓기던 김구 선생이 몸을 숨겼던, 중국 가흥의 '김구 피난처' 이야기다.

내부에는 인물 사진과 함께 저보성, 저봉장, 진동생, 주가예, 주애보 등의 글자가 나열돼 있었다. 알고 보니 중국인의 이름이었다. 목숨 걸고 김구 선생의 피신을 도운 까닭에, 그들을 기리는 흔적을 남겨두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 탐방단이 찾은 중국 가흥의 '김구 피난처'. 1932년 당시 일본에 쫓기던 김구 선생은 중국인 저보성 일가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몸을 숨겼다. ⓒ 류승연

실제로 근대 시기 중국의 사회 활동가였던 저보성은 1932년 '현상수배'에 걸렸던 김구 선생을 피신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뿐만 아니다. 저보성의 아들인 저봉장, 며느리 주가예, 양아들 진동생까지 그야말로 일가족이 힘을 모아 자싱에 김구를 위한 은신처를 마련했다.
 
김구 선생에게 도움을 줬던 인물로 여자 뱃사공 주애보도 빼놓을 수 없다. 가흥에서 만난 그는 중국인 '장진보'로 위장한 김구 선생과 부부 행세를 했다. 그 덕에 일본의 감시망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후 일제의 끈질긴 추적으로 피신처까지 위험해지자 주가예는 자신의 친정이었던 남북호 재청별장으로 김구를 피신시켰다.
 

김구 피난처와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재청별장. 한국어에 능통한 중국인 가이드가 탐방객들에게 당시 역사를 설명해주고 있다. ⓒ 류승연


탐방단 역시 곧바로 그 흔적을 따라나섰다. 김구 피난처와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재청별장은 당시의 기억을 머금고 있었다. 한국어에 능통한 중국인 가이드의 설명에 따라 내부를 한 바퀴 돌고 나니, 당시 독립투사들에게 손길을 내밀었던 몇몇 중국인들을 향한 감사함으로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궁금증도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김구 선생에게 걸린 현상금 60만 은화는 엄청난 크기의 돈이었다. 김구 선생을 신고해 포상금을 받는 '쉬운 결정'을 내릴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당시 저보성 일가와 주애보는 목숨을 걸고 김구 선생을 지켜냈다. 김구 선생과의 '신의'란 이들에게 60만 은화의 가치보다 컸던 셈이다. 당시 이들에게 김구 선생이란 어떤 존재였던 것일까. 또 무엇이 그 신의를 가능케 했을까.
 
김구 선생의 둘째 아들인 김신 장군이 이 별장 뒤뜰에 '음수사원 한중우의(飮水思源 韓中友誼)'라는 글을 적어 중국인들을 향한 감사를 표시하고 있기도 했다. 물을 마시며 근원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일제의 압박에서도 김구 선생의 피난을 도왔던 저보성 가족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한 것이다.
 
'음수사원 한중우의'
 
이후 이동한 난징에서는 김구 선생이 장개석 총통과의 일 대 일 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머물던 호텔에 직접 묵기도 했다. 영어로 Centre Hotel, 우리말로 '중앙반점'이다. 한때는 난징 중심가에서 가장 근사했을 호텔. 세월의 때가 묻은 지금은 오래 사용한 가죽 가방처럼 고풍스러운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1933년 김구 선생은 장 총통과 만나 재정을 지원해달라며 추가 의거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당시 화폐로 100만 원을 요구하며 일본과 조선, 만주 등 세 곳에서 폭동을 일으키겠다고 밝힌 것이다. 장 총통으로부터 '계획을 글로 적어 달라'는 이야기를 들은 뒤 이곳 중앙반점으로 돌아와 밤을 꼬박 새기도 했다고 한다.
 

80여 년 전 백범 김구 선생이 장개석 총통과의 일 대 일 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머물렀던 호텔. ⓒ 류승연


다음 날 김구 선생의 의거 계획서를 확인한 장 총통은 "천황을 죽인다고 해도 천황은 또 나올 것이고, 대장을 죽인다 해도 대장이 또 나올 것"라며 제대로 된 군인을 키워보자고 제안했고, 결국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 특별반이 설치됐다. 이로써 한국 청년 몇몇이 군사훈련을 받게 됐던 것이다.
 
이번 역사 탐방에 참가한 인천의 한 초등학교 김미연 교사는 "독립투사들에 도움을 준 중국인들에게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면서도 "역사 교과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설명하는 참된 교사가 되겠다"고 말했다.
 
연극을 연출하는 취미를 갖고 있다는 중학교 2학년 이순민양 역시 "몇몇 중국인들의 도움으로 독립투사들이 몸을 숨겼던 김구 피난처가 가장 인상 깊었다"며 "혹시 들킬까 숨죽였을 그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고 했다.
 
이어 "타국에서 목숨을 걸고 고생한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있었음에도 학생들에게는 백범 김구의 이름만 익숙하다"며 "연극을 통해 더 많은 대중들에게 역사 그대로를 알릴 기회가 오길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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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마이뉴스 류승연기자입니다.